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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6-09 12:57
몽학선생 율법은 구원받은 자의 성화의 열매의 척도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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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운 목사 |  2127432@naver.com

몽학선생 율법은 구원받은 자의 성화의 열매의 척도




바울은 갈3:23에서 율법을 몽학선생으로 부르며, 그 유효기간을 "믿음이 오기 전",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로 한정하고 있다. 그는 이 비유를 통하여 율법의 목적과 한계를 분명하게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면 그가 몽학선생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드러내고자했던 율법의 목적과 한계를 살펴본 후 구원 얻은 신자에게 율법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살펴보자.




몽학선생의 의미

몽학선생(παιδαγωγος)은 헬라어 사전에서 "아이의 인도자", "주인의 자녀를 학교에 등하교 시키는 책임을 맡은 종" ," 가정교사" 등으로 정의내리고 있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관습을 조금 더 살펴보면 몽학선생은 주인의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기초적인 내용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학교에 등하교를 시키며 후견인의 역할을 맡기던 당시 관습에서 사용한 용어였다. 주인의 아들이 주인이 정한 때까지만 몽학선생으로서 가르칠 수 있었고, 그 기한이 끝나면 이제 완전한 종으로 주인의 아들을 섬겨야 했던 것이다. 이처럼 몽학선생은 그 목적과 한계가 분명히 정해져 있었다. 바울은 바로 이 몽학선생이라는 비유를 통하여 율법의 목적과 기한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율법의 목적은 진짜 선생되신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며 그 기한은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의 완성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실 때까지였다. 따라서 진짜 선생되시는 그리스도께 인도했다면 그 주어진 목적을 완수한 것이므로 더 이상 우리의 구원문제 에 있어서 율법은 아무 것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원래 율법은 구원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하여 주어진 몽학선생, 그리스도라는 진짜 선생에게 인도하려는 목적과 기한이 한정된 것이었다. 이것이 바울이 사용한 몽학선생이라는 용어의 헬라적 의미였다.




몽학선생인 율법의 역할

그러면 율법은 어떻게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하는 것일까? 사실 율법은 완벽히 지킬 때 의롭게 될 수 있는 법이었다. 그런데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누구도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었다. 그러니 아무리 노력해도 지킬 수 없는 율법은 구원에 대한 소망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함을 절감하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 언약으로 약속하신 메시아를 고대하게 만들 뿐이었다. 따라서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자들에게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정죄와 심판의 두려움이었다. 이 율법의 요구 때문에 그들은 이 짐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메시아)는 십자가의 대속죽음을 통하여 그들이 받아야 할 율법의 정죄와 심판을 대신 받으심으로 율법의 정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시고 영생을 허락해 주셨다. 이처럼 율법은 율법을 지키려는 자들에게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자신의 전적인 무능력을 절감케 함으로 그리스도께 인도해 준다.

   

그렇다면 한글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παιδαγωγος(paidagogos)는 어떻게 몽학선생으로 번역된 것일까? 몽학선생이란 용어는 조선시대부터 사용했던 몽학훈장에서 나온 단어였다. 몽학선생에서 몽학(蒙學)은 어린 아이의 학문이라는 의미로, 어린 아이들에게 천자문부터 시작하여 유교의 기초를 가르치는 일을 한 선생을 일컫는 말이었다. 몽학교재로는 박세무(1457~1554)가 자신의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집필한 교재인 동몽선습이 대표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의 제자들과 문인들을 통하여 널리 알려지면서 왕세자는 물론 사림의 자제들까지 어린 학동들의 교재로 사용하였다. 1742년에 영조는 동몽선습에 서문을 써주면서 교서관에서 간행할 것을 명령함으로서 동몽선습은 최초의 국정교과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동몽선습과 함께 소학(小學), 율곡 이이가 쓴 격몽요결도 대표적인 몽학교재였다. 몽학교재들을 통하여 삼강오륜,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 인간의 기초 도리와 예법 등 유학의 기초를 다지면 비로소 사서삼경같은 어려운 책을 공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몽학선생은 더 어려운 유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기초를 닦아주는 역할을 한 선생으로서 그의 도움으로 몽학교재를 다 공부하면 이제 스스로 사서삼경을 공부할 수 있는 실력을 쌓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몽학선생이나 몽학교재)의 도움은 필요 없게 된다.

따라서 율법을 몽학선생으로 번역한 것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인식하고 구원을 위하여 율법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게 하려는 율법의 본래 목적을 잘 반영한 번역으로 볼 수 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3:24,25)." 이제 그리스도가 오셨음으로 더 이상 구원을 위해서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되었음, 즉 율법의 한계를 이 몽학선생이라는 한 단어가 정확히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 받은 신자에게 율법의 의미

율법은 이렇게 구원을 위해서 지켜야 될 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이 자신의 행위나 노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알려주기 위하여 주어진 법이었다. 그러면 율법을 통하여 구원 받은 사람은 더 이상 몽학선생, 초등교사의 도움이 필요 없기 때문에 율법을 완전히 무시해도 될까? 결코 그렇지 않다. 이제 율법은 구원 받기 위하여서 반드시 지켜야 될 법이 아니라 구원 받은 성도가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여 맺어야 할 구원의 열매가 무엇인지 제시해준다.

율법에는 도덕법, 의식법, 사회법이 있다. 먼저 의식법은 구약 시대 성전과 관련된 법으로서 모든 정결예식을 포함한 법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속죽음을 통하여 완성되었을 뿐 아니라 성전이나 제사장, 제단같은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지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지켜서도 안 되는 법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죽음을 통하여 완성된 법을 지킨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의 완전성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신학적 이유 때문에 우리가 천주교의 미사를 거부하는 것이다. 또한 같은 이유로 성전(건축)이란 단어는 신학적으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며 목사도 제사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완성된 의식법 제도 하에서 주어졌던 성전이나 제사장에 대한 헌신을 통하여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그들이 신학적으로 얼마나 무지한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의식법과 함께 고대 농경사회의 규범으로 주어진 사회법 또한 오늘날 현대 산업화 사회에는 적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도덕법은 십계명이 주어지기 전부터 존재하던 인간의 기본적인 윤리로서 특별히 구원 받은 신자들에게는 어떤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인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주께서 요구하시는 삶임을 제시해 준다. 따라서 의식법이나 사회법은 더 이상 지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지켜서도 안 되는 법이지만 도덕법은 구원 받은 신자라면 마땅히 지켜야 하는 법이다. 물론 구원을 위해서 지키거나 구원을 유지하기 위하여 지키라는 것이 아니다. 구원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원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말이다.




도덕법, 성화의 척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적 명령은 결코 부담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죽음으로 구원 받았음을 진정으로 깨닫고 믿는 사람이라면 주께서 요구하시는 삶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행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육신에 남은 죄악된 본성 때문에 주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 고통이고 갈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십계명과 같은 도덕법은 구원 받은 자에게 자신이 얼마나 변화(성화)되었는지 점검하게 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율법을 지킴으로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이교도적인 주장,성경적 관점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잘못된 신앙이 교회 내에 버젓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율법이 무엇인지 그 기초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의 방증이다. 인간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복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면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다. 아담의 타락으로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하여 바울의 엡2:1-3절 말씀대로 허물과 죄로 죽어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을 뿐 아니라 구원 이후에도 여전히 죄악된 육신의 본성의 영향으로 주의 뜻대로 살지 못함으로 탄식해야 하는 자신의 본모습을 성경적으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비성경적인 주장이 유행하고 있는 것이다.







결 론

율법은 행함으로 복주기 위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인도하려고,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절감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게 하려고 주신 법, 말 그대로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다. 따라서 율법을 통하여 자신의 행위로는 구원 받을 수 없음을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게 함으로 구원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이렇게 구원 받은 사람들은 이제 구원을 유지하거나 더 확고하게 하려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오직 그 은혜에 감사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율법 중 영원히 유효한 도덕법을 지킴으로 주님을 닮아가는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