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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6-07 14:17
당신에게는 위임된 통치권이 있다(양봉식 목사)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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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는 위임된 통치권이 있다 

‘복음’은 사단에게 넘어간 모든 통치권의 ‘회복’
 

 
 양봉식 목사 sunyang@amennews.com 
 
 

양봉식 목사 / 칼럼리스트(The Way), <교회와신앙> 객원기자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 양봉식 목사

그리스도인의 삶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높아지려고 노력하는 삶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미 가진 것을 나타내는 삶이다. 부족한 삶으로 출발하지 않는다. 시편 23편은 진리이자 사실이다. 다윗은 이미 계시를 통해 그리스도의 목자되심을 알았다.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며 그분이 우리의 만족임을 고백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그 창조 목적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통치권자로 사람을 세울 때 부족한 가운데 세우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6-28).


아담의 첫 통치권 행사는 동물 이름 짓는 일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형상의 히브리어 ‘체렘’의 뜻은 그림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거의 흡사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처럼 지으셨다.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흡사한 존재로 지으신 것이다. 그들에게 이 땅을 통치하도록 하셨다. 즉, 하나님의 목적대로 인간이 창조된 뒤에 그 명령을 따라 아담은 통치권을 행사했다.

첫 번째 행사한 통치권은 하늘의 새와 땅의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일이었다. 지구상의 모든 움직이는 동물들의 대표들은 아담 앞으로 와야 했다. 물론 불러 모은 것은 하나님이시지만 이름 짓는 일은 아담이 해야 했다. 이 때 아담은 동물과 새의 이름을 겉모양을 따라 짓지 않았다. 이름 짓는 대상의 속성을 따라 지었다. 아담은 아직 타락하지 않은 상태였고 그는 성령으로 충만해 있었다.

외모로 사물을 본 것이 아니라 생명의 충만함을 따라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영적 존재였다. 아담의 이런 비상한 능력은 그가 하나님을 대적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었을 때 사라졌다.

타락했을 때 더 이상 성령께서 사람 안에 머물러 계시지 않았다. 인간은 철저한 영적 죽음의 존재가 되었다. 전 존재가 부패된 것이다. 전적타락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떠나 인간의 생명인 혼(프쉬케)이 중심이 되어 사는 존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영적 생명이 없는 영적 죽음(사단의 본성)이 본질이 되어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담이 타락한 뒤에 그 눈이 밝아진 것은 곧 감각적 존재가 된 것으로 영의 지식을 받을 수 없게 된 것을 의미한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지식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 수 없고 영의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태가 타락한 인간의 상태이다.

모든 인류는 영적 생명을 잃어버리고 영적 죽음이 본질이 되어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기를 고대했다. 그리고 그 여자의 후손이 나타났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새로운 종족으로 인류를 이끄셨다.


생명을 낳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

죄 없는 분이 죄를 짊어지셔서 인류의 죄의 문제를 끝장냈다. 그분이 사망을 이기고 일어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예수님 안에 자신의 생명으로 낳게 하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그 안에서 합법적으로 자신의 생명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도록 하셨다. 이것은 인류에게는 엄청난 사건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대로 여자의 후손을 통해 인류를 다시금 에덴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에덴이 회복된 것일까? 종말론적 성취의 측면에서 보면 아직 온전한 회복을 하지 않았다. 에덴은 실제의 땅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하늘과 땅이 맞닿는 매우 신비적인 장소였다. 하나님은 어느 곳을 에덴으로 창설했다. ‘창설했다’의 히브리어 ‘나타’의 의미는 ‘박히다’ 즉 고정시키다, 경작자적인 측면의 ‘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에덴은 자라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곧 에덴이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그 나라는 확장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에덴은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금 회복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이 의미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나라가 시작된 것이다.

인류는 아담의 허리에서 나왔다. 모든 인류가 죄악 가운데 탄생한 것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출생을 한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아담 안에 있지 않고 예수님 안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육신은 여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진리를 관념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새로운 피조물이 탄생은 육체가 아니라 영이라는 것을 점에서 실제적인 사건임에도 실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결코 비유가 아니라 실제인 변화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자신의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신다.

그래서 영적 생명인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사람은 사단의 본성이 아닌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여 살게 되는 것이다. 비록 육신이 여전히 죽을 몸이고 여전히 옛사람의 사고가 있을지라도 예수님 안에서 실제적인 탄생을 하게 된 것이다.


사망과 상관없는 새로운 피조물

믿는 자는 더 이상 사망이 그를 주관하지 못하며 죽더라도(육체) 죽지 않고 생명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로 가게 된다. 사망은 오직 불신자들에게만 적용된다. 육체적 죽음이 일어났을 때 그 죽은 사람의 영혼은 곧바로 사망의 주관 아래 지옥으로 가게 되어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육체의 죽음) 살겠고(부활)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하나님의 생명)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하나님의 생명(영생)을 소유한 자는 더 이상 사망과 상관이 없는 자가 된다. 그래서 바울은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5-56)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죄의 권능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들은 사망이 어떤 위협도 할 수 없다. 이는 믿는 자는 사망과 상관없는 영역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탄생을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안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은 자에게 합법적으로 자신의 생명으로 자녀를 생산하신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히 1:5).

이 말씀은 예수님 안에서 모든 믿는 자에게 적용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같이 한 근원에서 태어났으며,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자녀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3, 참조; 고전 1:30, 요일 3:9, 5:4).

그리스도인은 땅에 속해서 죽음 가운데 처하여 사는 자가 아니다. 땅에 속한 자는 땅의 일을 할 뿐만 아니라 땅의 소리를 듣고 산다. 그렇지만 하늘에 속한 자로 이제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땅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땅의 사람처럼 살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는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유업인 상속을 받은 자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먹고 마시는 일이나 입을 위해 수고하는 일을 해야 하지만 그것은 중심이 되지 않은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복음은 죄사함이 전부가 아니다. 예수님 안에서 아담이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게 된 것이 복음이다. 이것은 사단에게 넘겨 준 모든 통치권의 회복이다.


하늘과 땅의 권세 소유한 그리스도인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권세를 일부만 교회에 위임한 것이 아니라 모든 권세를 위임하셨다. 교회는 그의 몸으로서도 그 권세를 모두 가지고 있다. 각각의 지체로서 그 권세를 사용한다. 사도와 선지자로, 교사와 목사와 성도들이 지체들을 통해서 그 권세들이 사용된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왕 같은 통치권을 가지고 있다. 지옥의 어떤 권세도, 심지어 루시퍼조차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순복해야 하는 것이 십자가의 승리이다. 이것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안에서 위임된 통치권을 가지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하는 일이 시급하다. 이미 주어진 것들을 달라고 하는 어리석을 실수를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죄사함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심지어 믿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죄인이 아님에도 여전히 죄인이라고 고백한다. 의인은 넘어져도 의인인데 지속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획득한 거룩함을 자신이 넘어짐으로 훼손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행위를 통해 그 거룩함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타락한 아담 안에 거하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 그 저주들은 가난과 질병과 연약함과 각종 악함의 죄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저주와 상관이 없다. 거기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상관이 없는 자들이다. 어둠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 사는 영역이 바뀌었다. 어둠의 권세가 영향력을 끼칠 수 없는 영역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영역인 옛사람의 영역에서 죄가 욕심을 따라 틈이 생겨서 들어올 수 있지만 이미 그리스도인들은 죄에서 벗어난 자들이다. 그런데 이 진리의 복음을 올바로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을 갈 수 있다는 것은 믿지만 그 나머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늘의 신령한 축복은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누리지 못한다. 이미 부요하며 건강하며 지혜로우며 부족함이 없으며 희락과 평강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그것을 추구하고 채우려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다.




더 이상 육을 따라 감각에 매여 사는 것이 아니라 영을 따라 약속의 말씀을 믿고 말하고 누리는 자가 된 것이다. 이 원리는 복음을 듣고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고백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과 같다. 이미 주님이 나를 위해 하신 모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현실에서 나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서 있으면 그 약속의 말씀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 약속은 자기 계발서에서 말하는 인간적인 의지에서 나오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자기의 노력이 아니라 약속을 붙잡는 것이다.




예수님이 친히 마가복음 11:23절을 통해 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 말을 따라 믿음으로 행동해서 고침을 받았다. 감각에 매인 이들은 열 명이 정탐꾼의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이 약속을 붙잡고 현실에 보이는 것을 말하지 않음으로 인해 결국 가나안에 들어갔다. 주의해야 할 것은 약속을 붙잡고 있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믿음의 수고가 있어야 한다. 갈렙은 80이 넘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속한 산지를 달라고 요구하고 그 산지를 얻기 위한 싸움을 했다. 믿음의 수고를 하는 것이다.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을 이루는 삶이다(구원을 이루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으로 미루겠다).




구원을 받는 일이나 이 땅에서 하나님의 유업을 누리는 것은 같은 원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왕이요 제사장이며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예수님이 되찾은 위임된 통치권을 행사하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