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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7-07 19:41
단군이 욕단?, 유석근의 <알이랑 민족>은 허구(이창모 목사)
 글쓴이 : 예성
조회 : 9,854  

이창모 목사



유석근의 <알이랑 민족>은 fact없는 fiction!

창 10:30절에 근거한다는 '알이랑 민족'은 허구
 

글을 열며
 
 

필자는 <바른믿음>에서 조덕영 교수의 글들을 읽고서야 유석근 목사의 <알이랑 민족>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조덕영 교수의 학문의 깊이와 그의 신실성은 많은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바이기에, 필자는 <알이랑 민족>에 대한 호기심과 또 목회자로서 진리를 수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유석근 목사의 <알이랑 민족>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필자는 그 책을 읽는 동안에 미세먼지로 오염된 공기를 마시는 것 이상으로 견디기가 어려웠다. 왜냐하면 적어도 필자에게는 fact가 없는 성경 이야기는, 매연을 들이마시는 것보다도 더 견디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것은 시간낭비라는 생각에 몇 번이고 책을 던져버릴까 했지만, 사명감으로 이 책에 미혹된 자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심한 기침을 계속 하면서,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아무튼 <알이랑 민족>은 궤변과 독단과 무지의 극치로 어우러져 있는, 다른 데서는 결코 보기 어려운 해괴한 책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필자는 앞으로 계속해서 <알이랑 민족> 속에 숨어있는 궤변과 독단 그리고 무지의 오염물질들을 파헤칠 것이다. 그러므로 <알이랑 민족>에 배어있는 오염물질에 중독된 자들과 또 <알이랑 민족>의 당사자인 유석근 목사에게 경종을 울려, 깨닫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글만으로 다들 깨닫고 돌이키므로, 읽기조차 힘든 <알이랑 민족>에 대해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창10:30을 근거로 한 <알이랑 민족>은 fact 없는 fictlon이다
 


유석근 목사의 <알이랑 민족>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욕단의 후손은 어디로 갔을까? 성경은 그들이 동방의 산악 지대를 넘어 아시아로 갔다고 말한다. 욕단의 후손은 동쪽의 산악 지대를 넘어서 파미르 고원을 지나 찬산 산맥을 넘어, 알타이 산맥을 지나 아시아로 이동했으며, 이동할 때 불렀던 인류 최초의 찬송가가 “알이랑”이다. 따라서 욕단의 후손은 단군 자손의 시조이며, 그러므로 한 민족은 셈족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듯이 한 민족은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숨겨놓으신 또 다른 선민이다.
 
 

 

유석근 목사의 <알이랑 민족>이라는 fiction의 근거는 창10:30의 “동쪽”이다. 즉 욕단의 후손이 한반도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동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fact가 아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역사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욕단의 후손이 험난한 지형이 가로막고 있는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것은, 당시의 욕단의 후손이 가지고 있었던 문명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조덕영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바르게 지적했다.
 
"단군, 곧 욕단이 자녀들을 이끌고 야곱이 애굽으로 들어가듯 파미르고원과 천산산맥을 넘어 타클라마칸 사막과 고비사막을 지나 중국도 아닌 태백산 밑으로 왔다는 소설을 누가 믿겠는가? 역사적으로 천산산맥과 파미르고원을 제대로 넘은 집단 일행은 주후 740년 경 중국 당나라 장수가 된 패망한 고구려가문출신 고선지 장군이 이끌던 군대들이었다. 그들 당나라 군대의 눈물겨운 등반기는 유명하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동방으로 온 길은 파미르고원이나 천산산맥이 아니라(그 험난한 길로 들어가면 중국 대륙으로 들어가게 된다) 즉 우리 민족 주류는 (중국민족이 들어간 길이 아니라) 유목민(스키타이, 흉노, 훈족으로 지칭되던 우리 민족과 유난히 닮은 민족)들의 주 무대 곧 야벳의 땅인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윗 비단길)를 통해 몽골과 만주 지역으로 쉽게 들어왔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조덕영, "단군, 욕단설(說)은 성경적 이론이 아니다", <바른믿음>, 2016.6.24.>
 
그러면 유석근 목사가 창10:30에 언급된 ‘동쪽’을 근거로 왜 이런 fictlon을 썼을까? 그것은 성경 시대의 고대인들이 갖고 있는, 방향에 대한 관습을 잘 모르는 무지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애국가의 일부분인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에서 ‘남산’을 당연히 서울역 앞에 있는 남산이나, 또는 적어도 남쪽에 있는 산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동일한 무지이다.
 
한국인이 애국가를 부를 때, ‘남산 위에 저 소나무’를 서울역 앞 남산에 있는 소나무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남쪽에 있는 산은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fact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남산’은 서울 역 앞 남산이거나, 아니면 일반적으로 자신이 있는 장소에서 방위상으로 남쪽에 있는 산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제는 옛날 사람들에게는 ‘남산’이 그런 의미로 이해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애국가가 만들어진 시대에 ‘남산’은 방위상으로 남쪽에 있는 산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동네 앞에 있는 산을 통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멀리라도 자신의 동네 앞에 산이 있는 사람들은 애국가에서 말하는 남산과 무관하지 않은 자들이다. 이런 연유로 애국가만큼 전국 팔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노래도 없는 것 같다. 또 우리가 쓰는 북망산도 방위상으로 북쪽에 있는 산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동네 뒤쪽에 있는 산을 통칭하는 말이다. 아마도 동네 뒷산에 묘지가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방위상으로는 북쪽이 아니더라도 동네 뒤에 있는 산을 북망산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창10:30에 기록된 ‘동쪽’을 유석근 목사처럼 단순히 방위상의 동쪽 방향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애국가에 나오는 ‘남산’을 남쪽 방향에 있는 산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무지의 소치이다. 그러면 유석근 목사가 창10:30을 근거로, 요단 후손이 동쪽으로 갔다는 주장이 왜 fact 없는 삼류 fiction인지 성경 본문을 통해 살펴보자.
 


“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이었더라”(창10:30)
 
 

창10:30의 ‘동쪽’은 히브리어 원문에 보면 ‘qedemah’이다(히브리어 원문은 편의상 음가대로 알파벳으로 표기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표기할 것이다). 그런데 ‘qedemah’의 문자적인 의미는, 유석근 목사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 되겠지만, ‘동쪽’이 아니라 ‘앞쪽’이다. 일반적으로 고대인들에게는 오늘날처럼 방위상의 동서남북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비교적 단순했던 고대인들의 삶에서 동서남북이라는 정확한 방위는, 복잡 다다한 오늘날처럼 그렇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교적 단순했던 고대인들의 삶에서는 자신을 중심으로, 또는 자신이 사는 마을을 중심으로 앞쪽, 뒤쪽, 오른쪽, 왼쪽의 방향 표시 정도면 충분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창13:14)
 
 

이것을 히브리어 원문대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롯이 아브람으로부터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눈을 들어 네가 서 있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tzaponah)과 네게브(negebah) 그리고 앞쪽(qedemah)과 바다(yama)를 보아라”
 
 

성경 시대의 고대인들은 자신을 중심으로 앞쪽(또는 위쪽)을 ‘qedemah’로 표현했다(또 성경에서는 오른쪽을 남쪽으로, 왼쪽을 북쪽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야곱의 아들 ‘베냐민’은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이다(창35:16-18). 왜냐하면 다른 아들들은 북쪽에서 낳았는데, 베냐민은 남쪽에서 낳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른손의 아들’은 남쪽에서 낳은 아들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성경 시대에는 왼쪽을 북쪽으로, 오른쪽을 남쪽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물론 고대인들이 표현한 앞쪽(qedemah)이 꼭 동쪽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당시의 고대인들은 방위상으로 동쪽이 아니더라도(물론 동쪽일수도 있지만....) 자신, 또는 자신이 거주하는 마을을 중심으로, 앞쪽 방향을 ‘qedemah’로 표현했다는 말이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qedemah)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창13:10-11)
 
 

아브람과 롯이 헤어진 곳은 벧엘이다. 벧엘은 사해 북쪽에 위치해 있고, 롯이 바라본 요단 지역 소알 땅은 사해 남쪽 끝에 위치해 있다. 그렇다면 롯이 벧엘에서 요단 지역을 향해 이동한 방향은 동쪽이 아니라 남쪽이 된다. 다시 말하면 롯은 자신의 앞쪽(qedemah), 즉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물이 넉넉한 요단 지역을 가지기로 결정하고 앞쪽(qedemah), 즉 자신의 앞쪽에 펼쳐진 요단을 향해 남쪽 방향으로 옮겨간 것이다.
 
‘앞쪽’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qedemah’에 방위상의 ‘동쪽’이라는 의미가 들어온 것은 아무리 시간을 앞당겨 잡아도 모세오경 시대보다는 한참 후의 일이다. 따라서 적어도 구약 성경에 언급된 “qedemah”만큼은 전후문맥에 따라서 “앞쪽” 또는 “위쪽”으로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뜻에 훨씬 더 가까운, 즉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더 나은 변역일 것이다. 다행히 몇몇 번역 성경에서 이러한 고대의 상황을 고려해서 잘 번역한 부분이 왕상17:3 번역에서 발견된다.
 
하나님은 곧 있을 가뭄을 피해 생존할 수 있도록 엘리야에게 요단 ‘퀘데마흐’(qedemah) 쪽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고 말씀하셨고, 이에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요단 ‘퀘데마흐’(qedemah) 쪽 그릿 시냇가에 숨는다.
 
그런데 왕상17:3의 히브리어 원문인 ‘qedemah’를 [표준새번역]에서는 “요단 강 동쪽(qedemah)에 있는 그릿 시냇가에 숨어서 지내며,”로 번역했고, [현대인의성경]에서는 “요단강 동편(qedemah)의 그릿 시냇가에 숨고”로 번역했으며, [NIV]에서도 “hide in the Kerith Ravine, east(qedemah) of the Jordan.”으로 번역했다.
 
반면에 [한글개역]과 [개역개정]에서는 ‘qedemah’를 “요단 앞(qedemah) 그릿 시냇가에 숨고”로 번역했으며, [KJV]에서는 ‘qedemah’를 “and hide thyself by the brook Cherith, that is before(qedemah) Jordan.”으로 번역했다.
 
여기서 [표준새번역]과 [현대인의성경] 그리고 [NIV]는 히브리어 ‘qedemah’를, 나중에 들어온 의미인 ‘동쪽’으로 번역했고(이것은 추천할 만한 번역이 못된다), [한글개역]과 [개역개정] 그리고 [KJV]는 그 당시 고대인들의 방향에 대한 이해를 고려해서 ‘앞’이라고 잘 번역했다.
 
 

 

아무튼 창10:30의 히브리어 ‘qedemah’만을 근거로, 욕단의 후손이 진행한 방향이 방위상으로 동서남북 어느 쪽인지는 아무도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욕단의 후손이 진행한 방향은 처음 그들이 거주했던 진영의 앞쪽(qedemah) 방향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진행한 방향인 앞쪽(qedemah)은 방위상의 동서남북 중 과연 어느 방향이었을까? 유석근 목사의 주장대로 정말 동쪽이었을까? 아니면, 조덕영 교수의 주장대로 결코 동쪽은 아니었을까?
 
방위상의 동서남북 중 욕단의 후손이 가지 않았을 확률이 가장 높은 방향은, 오히려 유석근 목사가 주장하는 동쪽일 것이다. 왜냐하면, 조덕영 교수의 주장대로, 욕단의 후손이 바보가 아닌 이상, 당시의 문명 수준으로는 성인 남자들도 지나가기 거의 불가능했던 험준한 지형의 동쪽 방향을 택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노인들, 여자들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 따라서 창10:30에 기록된 ‘qedemah’(앞쪽)를 염두에 두고 판단한다면, 욕단 후손의 진행 방향은 그들의 진영에서 위쪽(고대인들은 앞쪽과 더불어 위쪽도 ‘qedemah’라고 불렀다)인 북쪽 방향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물론 이것도 가능성에 불과한, 말 그대로 추측이다. 만약 필자가 이 가능성의 추측을 근거로 ‘욕단의 후손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러시아인의 조상이 되었고, 러시아 민족은 또 다른 선민인 천손선민이라고 주장한다면, 이 역시 <알이랑 민족>과 같은 종류의 유치한 fiction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유석근 목사가 창10:30에 언급된 ‘동쪽’(qedemah)을 근거로, “욕단의 후손이 동쪽(east)으로 갔다‘는 것은 fact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처럼, 동쪽으로 간 <알이랑 민족>을 fiction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후로 서점에서는 소설책을 진열하는 곳에 <알이랑 민족>도 함께 진열해야 할 것이다.



엘(El)이 “알”이라고?
 
 

‘알이랑’이 시간이 지나면서 발음이 변해 ‘아리랑’이 되었다는 말은 그럴듯한 말 같지만, 다른 근거들 없이 단지 발음만 가지고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왜냐하면 사실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훨씬 더 높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나님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엘’이 ‘알’로 변했다는 말은, 더욱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지‘엘’이 ‘알’과 발음상으로 유사하다는 점과 저자의 추측성 상상력 말고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다른 증거들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증거들 없이 추측성의 상상력만으로 주장하는 말들을, 사람들은 궤변이라고 부른다.
 
유석근 목사가 주장하는 ‘엘’(하나님)이 ‘알’로 변했고, ‘이랑’은 ‘함께’라는 뜻이므로, ‘알이랑’은 ‘하나님과 함께’라는 뜻이라는 유석근 목사의 황당한 주장은(우리말 ‘이랑’에 ‘함께’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만으로, ‘알이랑’이 ‘알과 함께’라고 말하는 것도 역시 믿을만한 설명이 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밭이랑’이 ‘밭과 함께’라는 의미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가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 약 4000여 년 전에 달(moon)에서 우연히 새 한 마리가 지구로 날아들었다. 지구촌 사람들은 그 새를 신성시하여, 최상의 먹이를 제공하며, 귀하게 보살폈다. 달(moon)에서 온 새도 지구촌 사람들이 제공하는 먹이가 너무 맛있었던지, 떠날 생각은 하지 않고 날마다 과식을 하며 거기서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새는 자신의 고향인 달(moon)로 돌아가기 위해 날개 짓을 하며 날아가려고 했지만, 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과식으로 인해 살이 너무 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달(moon)에서 온 이 새는 지구촌 사람들과 함께 살았고, 지구촌 사람들은 이 새를 달(moon)에서 왔다고 해서 ‘닭’이라고 불렀다.
 
유석근 목사의 <알이랑 민족>에는 필자가 말한 “달->닭”과 유사한 종류의 근거 없는 황당한 주장들이 페이지마다 널려있다. 그럼에도 그동안 성경에서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하나님의 묵시를 자신이 처음 발견한 듯 의기양양한 유석근 목사의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운 참상이 아닐 수 없다. 다음에 이어지는 글에서 <알이랑 민족>의 페이지마다 널려 있는 유석근 목사의 궤변과 오만과 무지를, 한국교회의 건강한 신앙과 신학의 보호를 위해서 계속 살펴볼 것이다.


 


글을 닫으며
 
 
 
유석근 목사가 <알이랑 민족>에서 주장하는 “천손민족” 사상은 김성로 목사가 <부활복음>에서 주장하는 “부활 후 하늘 성소 제사”와 사실상 맥을 같이 한다. 왜냐하면 둘 다 십자가를 무너뜨리는 사탄적인 지혜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은 예수의 부활을 이용하여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데 비해, 유석근 목사의 <알이랑 민족>은 민족적 우월감을 부추겨서 간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피해 가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물며 목회자들까지도 여기에 쉽게 미혹되는 이유는 <부활복음>은 성경에 있는 예수의 부활을 교묘히 비틀어 이용하기 때문이며, <알이랑 민족> 역시도 창10:30등 성경에 나오는 말씀들을 교묘히 꼬아서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과 유석근 목사의 <알이랑 민족>은 성경적인 메시지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실상은 성경적 진리처럼 위장한 불경스러운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정통 교회가 이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알이랑 민족>은 유석근 목사가 최초로 발견하고 주장한 ‘묵시’가 아니다. 이전에도 이와 유사한 넋두리들이 한국교회, 특히 부흥회, 기도원 등에서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한 민족의 우월감을 부추기는 ‘하나님은 동방의 나라 한국을 가장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영적인 예루살렘인 대한민국 서울에 재림하실 것이다’ 등이 있다. 이런 넋두리들이 한국교회에서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바로 민족적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한 민족에게는, 우월감을 부추기는 생수 같은 복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적 우월감을 부추기는 사탄적인 미혹은 이미 오래전에 이스라엘이 빠졌던 사탄의 함정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선민이라는 우월감으로 이방인들을 지옥의 땔감 정도로 여겼다. 그러므로 차별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스라엘에 임했을 때,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선민사상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자칭 선민이었지만, 하나님의 구원 역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선민이 따로 없다. 로마서 9-11장을 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어려가지 특권을 주시면서 그들을 먼저 택하신 목적은, 오직 이방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도구로 쓰시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먼저 선택하셨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소유할 수 있는 자들은, 선민사상이나 <알이랑 민족>의 천손선민 사상을 붙드는 자들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2-13)
 
그러므로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는 <알이랑 민족>의 천손선민 따위의 특권의식은 이스라엘처럼 오히려 십자가를 외면하게 하는 사탄의 함정이 되고 만다. 사탄은 <알이랑 민족>을 통해 한 민족이 이스라엘과 함께 천손선민이 되게 하셨다는 민족적 우월감을 자극해서, 한국 사람들로 하여금 십자가보다 그것을 더 의지하도록 부추겨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28-29)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오늘날에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민족은 없다. 그래도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능멸하는 사탄적인 행위이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3:1)

 

 
 


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