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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6-21 15:55
현대 신학 강좌 강의안(조덕영 교수)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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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신학 강좌 강의안(조덕영 교수)

 

 

현대 신학의 배경(현대의 세계관)

 

-여기서는 현대신학을 태동케 만든 유럽의 상황에 대해 배운다.

-주로 역사적 배경을 따라가면서 그 이해를 돕는다.

 

1. 기계적 세계관

 

1) 기계적 세계관의 시작

16세기 전후하여 서양의 세계관의 세계상의 기계화(michanization of the world)의 시작

 

2) 15-6세기 이전 상황

(1) 우주 신성(the sacred cosmos)의 인정, 신적 질서의 세계, 조화와 의미의 세계

(2) 인간 외적 초월적 법, 도, 원리, 규범, 우주의 이성, 로고스의 지배를 받는 세계로 보다.

(3) 티코 브라헤

“인간은 적도 이하에서 살 수 없다. 거꾸로 살 수 없기 때문”

아이러니=> 무식한 사람들에 의해 무너져 버림(뱃사람!)

 

3) 15세기 이후 고대와 중세 과학의 무력화 시작

(1) 세계적 과학자들의 등장

쿠페르니쿠스(1473-1543),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 케플러(1571-1639), F.베이컨, 아이작 뉴턴(1642-1727) 등의 등장

(2)세계는 기계가 아닐까(clockwork image)?

 

4) 과학적 세계관 등장에 따른 구 세계관의 붕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세계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적 세계관, 단테의 민속, 문학적 세계관의 붕괴

 

5) 근대 과학 탄생의 결정타

르네상스적 인본주의에 따른 세계상의 변화

 

6)근대 과학의 부산물

(1) 종교적, 철학적 공허와 불안을 가져오다.

(2) 파스칼의 ‘생각하는 갈대’, 유한성을 인식하는 갈대

 

7) 공허와 불안을 메울 새로운 정신적 토대는 무엇인가(새로운 신화 또는 story)

(1) 근대 철학의 탄생(존재론과 인식론

(2) 근대 서구적 합리주의적 세계관 시작

(3) 즉 신앙이 상실되어가는 시대의 세계관적 시조(데카르트, 1596-1650)

스콜라,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늘날 정신적 토대가 될 수 없다(의심으로부터 출발)

<방법서설>= 새로운 방법 추구

<제일 철학의 성찰> 이성적 자아에서 세계와 지식의 기초 발견

 

2. 계몽주의(the Enlightenment) 세계관

 

1. 계몽주의는 17-8세기 발흥한 사상으로 과학기술과 합리적 세계관으로 미신과 무지에서 깨어난 인간이 살아갈 새로운 정신 세계와 문화 전체의 방향을 설정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으로 참된 의미의 근대를 여는 정신적 운동이었다.

 

2. 계몽주의의 이상

전통과 봉건적 구습과 미신과 독단에 매인 몽매(夢寐)를 자연의 빛 즉 이성에 비추어 인간의 존엄을 자각하고자하는데 두었다. 즉 계몽적 주체는 이성적 자아(rational subject)였다.

 

3.계몽주의의 특징

1) 이론적인 면=과학적 자연주의, 유물론적 실증주의

2) 윤리적 측면=상대주의적 이성, 공리주의

3) 종교적 측면=기성종교 배격, 이성종교 내지 무신론

4) 역사=진보적 이상

5) 계몽주의의 수단=이성의 개혁을 실행하는 주요 수단은 교육이다!(루소-페스탈로치)

 

4. 계몽주의의 의의

1) 인간 이성의 신뢰: 하나님 없이 가능해진 것들이 많음을 발견(예:천동설)

2) 휴머니즘(인본주의, 인간주의, 인도주의) 시대의 체계화 본격화 개막(19세기 전성기)

 

5. 계몽주의의 영향

1) 계몽주의란 무엇인가? 미숙의 굴레(주로 기독교)를 벗는 것

2) Aude sapere(아는데 용감하라)

3) 인간 스스로의 영광 추구 시작

 

6. 기독교에의 영향

1) 인본주의에 굴복한 19C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

*신앙의 목적은 인간화(humanization)

* 신앙은 사람다운 사람을 만드는 것

* 축복위주의 보수적 신비신앙도 알고 보면 미신적 인본주의이다.

* 인간은 신을 섬기기 위한 노예가 아니라 인간은 스스로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행복과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가진 위대한 존재가 되다.

 

7. 르네상스 운동의 종교성

신으로부터의 자유와 자율성 속에 바탕을 둔 휴머니즘적 인간 인격 종교 추구.

8. 인본주의 자율의 결과: 인본주의 자율의 어두운 면은 무엇인가? 소외이다!(alienation)



현대의 세계관 3(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1) 모더니즘이란
(1) 과학과 이성 중심의 근대성의 시대
(2) 거대담론의 시대

2) 포스트모더니즘이란
(1) 아놀드 초인비의 <역사의 연구>: 서구 역사에 대한 네 시기 구분(암흑기, 중세기, 모던 포스트모던)
(2) 제 1차 세계대전 또는 1870년대 이후(합리주의가 붕괴되고 무정부주의의 도래)
(3) 1960년대 예술, 건축, 사상 영역으로 확장
(4) 해체, 반문화 운동의 시작
(5) 거대담론의 해체
(6) “터”가 무너진 시대
(7) 타율에서 자율로(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아리스토텔레스)

3)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변화가 기독교 세계관에 미치는 영향

(1) 기독교는 진리의 종교이다
포스트모던은 진리의 해체에 대한 기독교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2) 포스트모던적 위기는 기회이기도 하다.
포스트모던의 자율적 집단성이 위기를 기회(선교적 부흥의 기회)로 만들 수도 있다.








제 2장 초월성의 재건: 19세기 신학에서의 내재성

 

1. 임마누엘 칸트- 도덕적 경험 속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1) 생애

*1724, 독일 쾨니히스베르그에서 경건한 청교도 가정 출생

*쾨니히스베르그 대학에서 수학, 자연과학, 신학, 철학 수학

*1775, 대학 강사

*1781, 순수이성비판

*1790, 판단력 비판

*1793, 종교론

*1796, 대학 은퇴

*1804, 세상을 뜨다. 평생 독신

 

2) 칸트 사상

* 종교를 판단하는 기준은 이성

* 순수 이성으로는 종교를 파악할 수 없다

* 도덕 성립의 요소: 자유, 영혼불멸, 하나님

* 불가지론자

* 현상계(감각 경험)와 본체계(영혼, 천사, 하나님)

 

3) 실천철학

* 인간 감성에서 완전 분리된 것이 순수이성

* 그런데 순수 이성은 실재 규정이 어렵다

* 그러나 도덕적 실천에 있어서는 이성적 결정을 감성의 제약을 받지 않고 이성이 의지를 가지고 명령을 내린다. 여기서 자연을 초월한 자유가 존재함을 느끼게 된다,

* 영혼불멸과 도덕률 속에서 신의 존재를 체감함

 

4) 종교론

* 계시가 아닌 이성 안에서의 종교, 도덕 종교

* 인간의 범죄 의식과 의무 의식에서 나오는 양심

* 정언명령 “너는 할 수 있기 때문에 해야한다”(Du sollst, also du cannst)

*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에 대해 별 관심이 없음

* “최고선은 행복과 결합한 덕이다”

 

2. 헤겔- 사변 이성 속에서 내재 하시는 하나님

 

1) 생애

* 1770, 독일 슈트트가르트 생

* 튀빙겐대에서 철학, 신학 공부

* 쉘링 추천으로 예나대 교수, 하이델베르그 철학 교수

* 1818, 베를린대학 철학 교수

 

2) 철학

* 신학과 철학의 병합 시도(하나님은 절대 정신)

* 철학을 과학보다 상위에 두다

* 철학을 역사 속에서 살펴보려 하다(절대정신의 자아실현 과정-정,반,합으로 진행)

* 범신론자

* 기독교는 모든 종교 중 가장 높고 완전한 종교

* 존재론적 일원론

* 유물론 철학과 변증법적 유물사관에 영향

* 헤겔은 기독교의 최대 원수다(신사훈 박사)

 

3. 슐라이엘마허- 종교적 감정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 현대신학의 아버지

* 19세기 대이단자

 

1) 생애

* 1768,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개혁교회 목사 아들(친가 외가 모두 목사 집안)

* 아버지는 프러시아 군대 군목(모라비안 공동체와 만남 사건)

* 1783, 모라비안 교단 학교 입학 철저한 경건 훈련(문학과 철학 서적 탐독 시기)

* 회의 시작- ‘인자’가 어떻게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인가?

* 1787, 신학교 중퇴, 할레대학 입학(철학 서적에 몰두 시기)

* 1789, 대학 졸업 후 침체, 건강 문제

* 1790-1793, 귀족 가정 가정교사(신앙 회복 시기)

* 1794, 목사 고시 합격 목사 안수

* 1796, 병원 원목

* 1799, 종교론 출간(종교를 멸시하는 지성인들에게 종교 변증)

* 1804, 할레대학 교수, 설교자

 

2) 종교적 배경

* 개혁주의와 경건주의 전통

* 개혁교회 목사 안수

* 15세 때 종교 감정을 강조하는 종교개혁의 선구자 후스의 영향을 받은 모라비안과 교류

(1)종교 감정 (2) 종교와 철학 구분 (3) 그리스도 중심 신학 (4) 경건주의 (5) 할레대 (6) 루터교 유산

 

3) 철학적 배경

* 칸트에 심취

* 플라톤에 심취

* 계몽주의 영향

4) 신학 방법

* 계몽주의의 도전

* 인간 정신에 주목(knowing, doing, feeling)

* 신학의 과제는 “기독교의 생활에서 발견되는 종교적 감정을 기술하는 것이다”

* 위로부터의 신학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신학:

인간의 경험을 신학의 주된 자료로 삼음, 특별히 절대의존감정.

 

5) 기독론

(1) 역사 보다 경험, 의식에 의존

(2) 교회 전통 용어와 성서적 용어에 소극적 태도

->신성보다 신의식

(3) 그리스도 양성 교리 부정

(4) 양성 교류 교리 부정

(5) 동정녀 탄생 비판적

(6) 부활, 승천, 재임에 대해 회의적

 

6) 속죄론

(1) 징벌 속죄론을 거부하고 십자가보다 그리스도의 인격 즉 하나님 의식

(2) 그리스도 구속 사역이란 그리스도와 신자의 공동생활

(3) 그리스도의 죽음이 속죄 사역 본질이 아니다

(4) 주관적 인간중심적 속죄론

(5) 성경보다 인간 중심 해석

 

7) 죄론

(1)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보다 인간 영육 간에 나타나는 갈등과 대립 속에서 일어난다

(2) 죄 의식은 구속의 필요성에 대한 의식이다.

(3) 즉 죄는 구속이 필요성을 위해 하나님이 만드셨다. 그러므로 죄의 창시자는 하나님

 

8) 슐라이엘 마허의 오류

(1) 범신론자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모호한 진술

범신론: 초월성 부정 내재성만 강조, 하나님과 자연 동일시

이신론: 내재성 부정 초월성만 강조, 18세기 자연신학자들, 섭리주의 부정

스피노자에 대한 동경(종교론에서 스피노자 찬양)

하나님의 인격성에 대해 회의적

 

(2) 주관주의

하나님은 오직 신자의 감정 속에서 알 수 있다

 

(3) 불가지론자

하나님의 본성은 알 수 없다

4. 알브레히트 리츨(1822-1889)과 고전적 자유주의

 

1) 고전적 자유주의

(1) 개신교 고전적 자유주의는 리츨과 동의어

(2) 기독교 신조를 현대적 지식의 qc 아래서 평가

(3) 전통적 신조들 비판과 재구성

(4) 실천과 윤리에 초점

(5) 신학의 기초를 절대적 권위가 아닌 다른 것에서 찾음

(6) 초월 간과, 신적 내재성에 집중

 

2) 리츨 생애

(1) 독일 본(Bonn) 루터파 유명 목사 아들

(2) 철저한 종교교육

(3) 본 대학 입학(1839)

(4) 할레대 입학: 톨룩(1799-1877), J. 뮐러(1801-1878) 등에 대해 배움

(5) 하이델베르그에서 로데(1799-1867)와 친교

(6) 튀빙겐에서 신약 비평가 바우어(1792-1860)이 강의를 듣다

(7) 본 대학 강사(1846), 조직신학 강의(1852), 정교수(1859), 괴팅겐 대 교수(1864)

(8) 아내 사망(1869), 이후 20년 동안 아들과 독신 생활

(9) 괴팅겐에서 심장 마비로 사망(1889)

3) 리츨의 신학 방법

(1) 유물론과 실증주의에 포위 당한 시대적 상황

(2) 신학과 과학 사이의 갈등과 오해(과학적 유형=과학은 비주관적 인식 추구, 종교적 유형= 실재에 대한 가치 판단 추구)

(3) 즉 신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증명들은 과학적 지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신학은 최고의 선을 성취하기 위한 인간의 도덕적 삶에 한해서 하나님에 관심을 가진다. 따라서 신학은 교회 안에서 가질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집단적 종교경험 및 도덕적 경험을 연구하는 것이다.

(4) 신학의 근거와 규범은 성경 전체가 아니라 건전한 역사비평적 연구를 통해 얻은 ‘사도적 사상 체계’(apostolic circle of idea)이다.

(5) 리츨이 방법은 칸트 철학과 유사(형이상학을 배제하고 가능한 한 윤리학에 연관시키려함)

(6)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행한 일을 통해 알려질 수 있다고 주장한 데서 칸트와 다름

(7) 칸트의 phenomena와 noumena 구분을 거부

 

4) 리츨의 신론(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1) 그의 신학적 방법에 따라 인격적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과 그에 따른 가치 판단에 관심

(2) 즉 하나님 자체보다 하나님 나라에 더 많은 관심

(3) 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인류가 추구하는 최고의 목표이며 선일 뿐이다.

(4)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초월보다 하나님 나라의 내재성에 집중

5) 죄와 구원

(1) 종교적 초점은 죄인의 죄가 용서 받았다는 선언 곧 칭의

(2) 윤리적 초점은 화해된 사람을 향해 그 이웃을 향한 사랑을 실현하라고 부르신다고 봄

(3) 리츨에게 있어 구원은 이 두 가지를 포함한다

 

6) 기독론

(1) 전통적 기독론 무관심

(2) 부인한 것은 아님

(3) 역사적 그리스도로부터 시작= 교리, 인격에 대한 추상적 이론을 부정

(4)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이상이며 기독교 창시자이며 믿음의 창조자이다(맥킨토시 책, 현대신학의 유형들, 164).

(5) 그리스도를 부정한 것은 아니라 신성과 인성의 문제를 역사적 측면에서 도덕적으로 해석하려는 몸부림의 신학자였음

 

7) 평가

(1) 신학적 연구를 가치 판다느이 영역에 국한

(2)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

(3) 예수를 인간적, 종교적, 윤리적 이상으로 환원 시킴

 

8) 아돌프 하르낙

(1) 베를린대 교수(1889-1930)

(2) 교부신학 권위자

(3) 성경에서 복음의 핵심을 찾아서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 신학의 임무

(4) 문화와 기독교 신앙의 조화를 통한 실용적 기독교

(5) 헬라화 된 기독교에서 복음의 재발견 주장(극단적 자유주의 신학)

 

9) 윌터 라우렌 부시

(1) 루터교 목사 아들

(2) 부친은 미국 침례교 목사

(3) 독일 체류 시(1891년 몇 달) 윤리적 하나님 나라가 복음의 핵심이라는 리츨파 영향

(4) 빈부차 큰 미국 사회

(5) <기독교와 사회적 위기>, 1907년 출간

(6) 사회 복음을 위한 복음적 열정

(7) <사회 복음의 신학>, 1917년

(8) “진노하지 않는 하나님은 죄 없는 인간을,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심판 없는 나라로 보내셨다”(리처드 니버, 미국 속 하나님 왕국)

 

10) 헤르만(1846-1922)

(1) 할레대 강의, 1879년 마르부르그 대 조직신학교수

(2) 철학 칸트, 신학 리츨 영향

(3) 바르트, 불트만, 메이천의 스승

5. 칼 바르트(1886-1968, 하나님의 자유로서의 초월성)

 

1. 생애

1) 스위스 바젤 개혁파 교회 목사(Fritz 바르트) 장남

2) 1904 베를린 하르낙 사사

3) 튀빙겐, 바르부르그 대학 헤르만 사사(당시 불트만, 고가르텐 동문)

4) 스위스 자펜빌 목회

5) 1911년 로마서 주석 출판(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

6) 1921 괴팅겐 대, 1925 뮌스터 대 교수, 1930 본 대학 교수 취임(1932, 모차르트 음악 들으며 교회교의학 집필 시작 1968까지 계속, 8천면에 달하는 12권 미완성 저서)

7) 1933년 나치가 복음교회 사실상 지배(롬 13:1). 1933년 복음교회는 75% 나치 지지

8) 당시 제자 본 회퍼(1906-1945)- 본 대학

9) 1934. 5. 31. 바르멘 선언- 5개 조항-외국인으로 추방

10) 고향 바젤로 돌아와 신학 강의

11) 종전 후 다시 독일(1946-47) 교의학 강의

12) 바젤대 강의, 1968. 12.10일 83세 일기로 세상 뜨다. 명예박사는 많으나 학위는 못함

 

2, 신학적 방법(긍정과 부정)

1) 부정: 자연신학에 대한 회피

2) 긍정: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만남

 

3. 하나님 말씀과 성경

1) 하나님 말씀 세 가지(계시·복음 자체로서의 그리스도, 성경, 교회의 복음 선포 곧 설교)

2) 성경과 하나님 말씀의 구분

 

4. 그리스도 중심적 삼위일체 신학

1) 바르트 신학 구조의 핵심

2) 삼위일체 회복(존재 양태Seinsweise로서 위격보다 양태라는 말을 좋아함)

 

5. 자유로이 사랑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

1) 신적 탁월성으로서의 자유로운 사랑

2)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초월

 

6. 선택 교리

1) 예수 그리스도만이 배척받은 유일한 사람이다

2) 보편적 구원apokatastasis에 대한 답변 거부

 

7. 평가

1) 초월성의 회복

2) 세상과 인간 희생: 하나님을 큰소리로 말하며 정작 하나님의 세상과 자연과 인간에 대해 말하려 했던 실수

6. 에밀 부룬너(Emil Brunner, 1889-1966)-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서의 초월성

 

1. 생애

1) 1889. 12.23 스위스 취리히 출생

2) 취리히, 베를린 대학-칸트 관념 철학

3) 1913. 취리히대에서 칸트와 훗설 연구를 통해 신학박사

4) 1919 미 뉴욕 유니온 대학교수

5) 1924 모교 교수

6) 1938-1939 프린스턴 강의

7) 일본 국제대(1953) 교수 중 한국 잠시 방문

8) 1966 고향에서 사망

 

2. 신학적 관심사

1) 자유주의 신학 반대

2) 슐라이엘 마허 비판

 

3. Biblical Personalisn

1) 하나님은 인격적 하나님이다.

2)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진리나 지식은 반드시 이 ‘당신’에 적절한 것이어야 한다

3) 결과적으로 자연과학이 진리의 표준, 자율적 이성이 실재를 인식하는 유일의 적절한 방법이 되어버림

 

4. 만남으로서의 계시

1) 하나님을 객체화 시키지 말라

하나님에 대한 말이나 명제는 결코 계시의 위상을 가질 수 없다

2)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위기 속에서 발생하는 진리가 참이다

3) 따라서 계시와 성경 동일시 반대

 

5. 바르트와의 논쟁

1) 브룬너의 <자연과 은총>과 칼 바르트의 Nein!

2) 자연신학 논쟁

3) 바르트의 만인구원설 비판

 

6. 평가

1) 개혁신학을 현대적으로 재조명

2) 계시에 대한 인격적 이해

3) 정통주의 성경과 거부

4) 창조, 차락, 홍수, 바벨탑 사건을 역사적 사건이 아닌 신화라 함

5) 예수가 가르친 내용과 사도가 가르친 내용은 다르다

6) 성경 해석에 있어 원역사(Urgeschichte)와 일반역사(Historie) 구분

6) 신정통주의

7.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 케리그마의 초월성

 

1. 생애

1) 복음주의 루터파 목사(아프리카 선교사) 아들

2) 하르낙, 양식비평 궁켈 사사

3) 기독교 실존주의

2, 신앙과 역사적 예수

1) 양식 비평

2) 역사의 예수에 대해 부정적

3. 종말론

1) 초기 기독공동체의 하나님 나라 도래에 대한 종말적 착각

2) 현재적, 실존적 존재로서의 종말론

4. 신화론

1) 신화로 덮여있는 책 성경

2) 비신화화 해야

5. 해석학

1) 해석을 위한 전이해

2) 실존주의적 인간 이해

6. 하나님의 초월

1) 고전적 우주관은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과 모순

2) 실존적 하나님 만남

7. 실존주의와 신학:

신정통주의적

8. 하이덱거와 신학성경:

하이덱거의 실존적 철학

9. 실존주의와 범주들:

실존과 세계 구분

10. 본래적 실존:

본래적 실존과 비본래적 실존

11. 역사 개념:

히스토리와 게쉬히테 구분

12. 신앙과 복음: 케리그마

13. 비판: 성경 권위에 대한 추락

14. 일방적인 주해: 실존주의를 통한 단순화된 주해

15. 사유화된 신앙: 복음이 메시지에 대한 좁은 이해

16. 왜곡된 하나님: 무한한 질적 차이에 의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 왜곡

17. 결론

1) 친구인 칼 바르트와 함께 독일 개신교 신학 지평 재형성

2) 역사적 기독교 파괴

3) 기독교 초자연주의 완전 배제

4) 실존주의를 통한 성경 왜곡



제 11강 폴 틸리히

1. 폴 틸리히의 생애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 8.20-1965)는 독일 구벤(Guben) 지방(브란덴브르그)에 있는 작은 공업 도시 슈타르체델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보수적 성향의 루터교 목사였고 어머니는 개방적 성격의 사람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904-09년 베를린, 튀빙겐, 할레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면서 칸트, 피히테, 슐라이에르마허, 헤겔, 쉴링 등을 공부했는데 특히 쉘링이 그의 주된 연구 주제였습니다. 그는 피히테의 학문과 칸트의 비판 사상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며 쉘링에게서 자기 학문의 길을 찾게 됩니다. 쉘링은 칸트와 피히테에게서 영향을 받았고 주관과 객관을 통일하려한 통일철학과 절대자를 통한 자연철학을 꿈꾼 사람이었지요. 틸리히는 1910년 브레스라우대학에서 쉘링의 긍정철학에 있어서 종교사적 구성, 그 전제와 원리(Die religionsgeschichtliche Konstruktion in Schellings Positiver Philosophie, ihre Vorausetzung und Prinzipien) 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1911년 할레대학에서 쉘링의 철학적 발전에 있어서 신비주의와 죄의식 (Mystikund Schuldbewutsein in Schellings Positiver Philosophischer Entwicklung) 이라는 논문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이 신학박사 학위 논문에서 틸리히는 다음 명제를 내세웁니다. 첫째 진리와 도덕성, 신비주의와 죄의식의 통일은 발견되지 않았다. 둘째 진리와 도덕성(Sittlich keit), 신비주의와 죄의식 (Schuldbewatsein)은 사고의 극(極)들에 머문다. 틸리히는 이 극들을 종합하고자 하였지요. 여기서 틸리히의 문화신학적 사고가 잉태됩니다. 틸리히는 1916년 할레대학 신학대학에서 초자연적인 것의 개념(Begrift des Ubernaturlichen)이라는 논문으로 교수자격을 취득합니다. 그 후 교수 생활을 하면서 베를린, 마르부르그, 프랑크푸르트 대학과 미국 유니온 신학교와 시카고 대학에서 강의하였지요. 퇴직 후에는 하버드대학에서 초빙교수로 있었지요.

그의 사상은 철학자 M.켈러 및 F.W.J.셸링의 영향을 받아, 실존주의적 요소가 짙었으며,  나름의 독특한 존재론적 신학을 전개하였습니다. 신학 방법론에 있어 신학과 철학을 상관의 문답 관계로 이해하여, 상황 속에 포함되는 물음을 존재론적으로 분석함과 동시에 그 대답을 기독교의의 여러 상징에서 찾아내는 것을 특징으로 하였습니다. 저서에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1951∼1963) 《존재에 대한 용기:Courage to Be》(1952) 《새로운 존재:The New Being》(1955) 《문화의 신학》(Theology of Culture) 등이 있습니다.




2. 틸리히의 주요 신학


1)  상관의 방법(method of correlation)

  틸리히는 「경계선에서」(auf der Grenze, 1936)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써서 자신의 생애와 사상의 폭(幅)과 종합력과 변증법적 긴장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신앙과 회의, 철학과 신학, 유럽과 미국,기독교와 문화, 기독교와 타종교, 프로테스탄트교회와 카톨릭 교회,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 등의 경계선에서 특히신학과 철학, 종교와 문화 사이를 조정하고 종합하여 교량을 건설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고 전력을 다하였다고 말하지요..
  틸리히에 있어서 신학방법은 하나의 도구입니다. 또한 신학방법의 유용성은 조직신학의 목표이지 출발점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방법은 인식과정 자체에서 끊임없이 고려됩니다. 특히 틸리히는 실존적인 질문과 신학적인 대답의 상호 의존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설명하는 상관 방법(method of correlation)을 그의 고유한 방법으로 사용합니다. 틸리히는 이것으로 철학과 신학, 종교와 문화 가운데 어느 하나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양편을 조정하고 중재하여 양자 모두를 수용하는 신학체계를 구상한다고 말합니다.  그에 의하면, 결코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관여받지 않으시지만, 그러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여방식은 "인간적"입니다. 상관의 방법의 모티프는 바로 "인간적"이라는 강조점의 주목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상관의 방법은 하나님의 시선 만을 강조한 <정통주의>나 인간의 시선만을 강조한 <자유주의>의 오류를 극복하면서 이 양자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시도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그래서 틸리히의 신학을 바르트처럼 신정통주의 신학이라 말하지요. 상관의 방법은 실존적인 질문이 출현하는 인간의 상황을 분석하고, 기독교 메세지를 사용하는 상징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임을 보여줍니다.


2) 상관의 방법과 자연 과학

  틸리히에게 있어 과학과 신학도 상관의 관계 아래에서 충돌이 아닌 융화의 길을 모색하게 됩니다. 바르트가 자연과학이나 자연신학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었던 데 비해 틸리히는 그렇지 않습니다.  틸리히의 상관의 방법은 다음의 세 가지 방법의 오류를 피하면서 이것을 극복합니다.

    (1) 첫째는 구체적 인간 상황과는 무관한 <초자연주의적인 방법>supranaturalistic method이다. "계시된 말씀"에 대한 조율이 결핍된 "말씀의 계시"는 인간과는 무관할 뿐이다.      (2) 둘째는 구체적인 인간 상황만이 고려가 되는 <자연주의적 방법>naturalistic method이다. "계시된 말씀"이 "말씀의 계시"로 뒤바뀌어질 때 결국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당하게 된다.
    (3) 셋째는 인간 상황과 하나님 사이에 깊은 골을 그은 <이원론적 방법>dualistic method이다. "계시된 말씀"과 "말씀의 계시"는 결코 만날 수 없다는 자연신학적인 파토스는 결국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영원한 평행선만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틸리히 에 있어서 초자연은 숨겨진 자연이며, 자연은 나타난 초자연이다. 그는 <상관의 방법>이라는 묘(妙) 를 통하여, 실존의 분석에서 자연신학을 해명하고, 실존에 내포된 질문에 주어진 대답으로 초자연 신학을 해명한다. 이렇게 하여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 사이의 해리(解離)는 상관의 방법을 통하여 극복된다.

  이것이 틸리히의 신학이 일종의 상황 신학(situation theology)으로 불려지는 이유가 됩니다. 영원한 진리와 영원한 진리가 받아들여져야 하는 시대적 상황, 즉 메시지와 상황, 텍스트와 컨텍스트인 것이지요. 신학은 항상 이 양자 중 어느 하나를 희생 시킴으로서 균형을 잃을 위험성에 도달합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근본주의나 정통주의와 메시지를 희생시켜버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성으로 틸리히의 상관 방법은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해보고자하는 시도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틸리히에게 있어 자연과학은 메시지와의 충돌이 아닌 상관의 관계 아래에서 이해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3)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

  틸리히는 종교 또는 신앙을 “긍극적인 관심” 혹은 “궁극적인 관심에 붙잡힌 상태”로 정의 했습니다.  궁극적 관심이란 어떤 것에 대하여 궁극적으로 심각하게 다루는 것, 만사를 제쳐놓고 심각하게 취급하는 것을 말한다. 틸리히는 우리들의 존재를 결정해 주는 것, 즉 우리들이 존재하느냐 혹은 존재하지 않느냐를 결정해 주는 것이 궁극적 관심이라고 했습니다. 궁극적 관심의 내용은 어떤 특정 대상, 심지어는 하나님이어도 안 된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틸리히는 존재하느냐 혹은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것을 궁극적인 관심의 내용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궁극적 관심이 관심의 태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태도의 대상도 함께 의미합니다.  인간에게 궁극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인간의 관심이 신앙이라면, 인간이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하나님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만 궁극적인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틸리히는 궁극적인 관심의 상태인 종교적인 신앙은 상징적인 언어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요. 신앙을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언어란 곧 상징의 언어입니다. 상징은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을 지적하며, 지적하는 것에 스스로 참여합니다. 상징은 우리에게 닫혀져 있던 실재의 영역을 열어주는 동시에, 그것에 상응 할 수 있도록 우리 영혼의 차원을 높여 줍니다. 상징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또는 복합 적인 무의식으로부터 자연적으로 태어나서 성장하다 죽어 없어지는 것입니다.

틸리히에게 있어 다른 모든 관심은 궁극적인 의미가 없는 예비적인 관심에 불과했습니다. 궁극적인 관심은 무조건 적이기 때문에 어떤 성격, 욕망, 환경 등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틸리히는 종교적인 관심을 궁극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종교적 관심을 궁극적이며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이며 무한하다.”고 하였지요. 이 같은 틸리히의 관점은 종교란 인간의 궁극적 관심에 불과하며, 인간 정신 활동 중 한 가지 특수 기능이 아니라 정신적 삶의 모든 깊이의 차원이라는 식으로 나아갑니다. 이때 인간의 궁극적 관심사의 반영인 종교는 모든 문화의 실체이며,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 됩니다. 이렇게 틸리히의 '궁극적 관심'은 틸리히 자신이 사용한 '문화의 신학'과도 당연히 만나게 되는 겁니다.


4) 궁극적 관심과 창조주 하나님

  틸리히에게 있어 궁극적인 실재인 하나님에 대한 모든 신학적 진술 역시 상징적입니다. 틸리히에 따르면, 궁극적인 관심의 근본 상징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개념에 있어서 상징적인 것이 아닌 유일한 예외가 “하나님은 존재 자체”라는 진술뿐이이요. 하나님은 존재 자체이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로 표현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존재의 근거로서의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영역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단지 간접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만 말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인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등으로 부르는 것은 다 상징적인 것이 됩니다. 인간의 유한한 경험으로부터 유래한 표현을 세계를 초월한 무한한 존재에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인간 경험의 단편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경험을 초월합니다. 따라서 틸리히는 성경의 비문자화를 주장합니다. 성경은 하나의 상징이므로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틸리히는 자연스럽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틸리히에게있어 창조나 자연과학과 같은 것들은 문자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틸리히에게 있어 성경에 나타난 자연과학적인 언급이나 창조에 대한 서술은 모두 신학이나 철학과 전혀 충돌하지 않습니다. 충돌할 필요가 없는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틸리히의 전체 신학에서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을 존재 자체로 이해한 것입니다. 틸리히에 따르면, 하나님은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은 다른 여러 존재 가운데 하나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힘과 근거입니다. 존재의 힘 또는 존재의 근거는 존재 자체입니다. 모든 것은 이 존재의 힘에 참여하고 의존함으로써 존재합니다. 존재 자체는 모든 존재하고 있는 것들 혹은 존재들의 근거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틸리히는 인격성을 지닌 하나님에 대해 부정합니다.  틸리히에게 있어 성격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동, 열정, 기대, 기억, 고난, 기쁨 등과 같은 인격적인 표현은 존재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고 단지 하나님을 살아있는 하나님으로 만들려는 상징에 불과합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이란 말은 “하나님이 하나의 인격”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은 인격적인 모든 것의 근거라는 것과 그 안에 인격성의 존재론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틸리히에 따르면, 고대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인격적이라고 생각하니 않았습니다. 그들은 인격이란 용어를 하나님 자체가 아닌 삼위일체의 개체에 사용했을 뿐이지요. 틸리히에 따르면 하나님을 인격적인 존재로 간주하게 된 것은 19세기 현대 신학자들에 의해서 였습니다. 따라서 틸리히는 하나님의 인격을 상징적인 의미로 밖에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틸리히에게 있어 자연과학과 인격적인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관심은 당연히 궁극적 관심의 영역 밖으로 보입니다.


5) 새로운 존재(the New Being)

  틸리히는 인간의 실존 상황을 분석하고 그 해결책으로 새로운 존재의 개념을 제시합니다. 인간의 실존 해명이 곧 그의 죄론이며, 새로운 존재의 개념이 그의 기독론이 됩니다. 틸리히는 인간의 실존 상황을 소외의 상태로 규정하는 한편,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새로운 존재의 지참자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했습니다.

  “실존한다”(to exist)는 말은 어원학적으로 “밖에 선다”(to stand out)는 것을 의미하는 데, 그것은 존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즉 비존재로부터 나와서 존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양철학은 실재를 본질과 실존의 두 측면으로 나눕니다. 이 실존이나 존재라는 말은 틸리히 사상에 있어 중요한데 특별히 존재라는 말은 정적이 아닌 동적인 말로서 중요합니다. 틸리히에게 있어 존재의 힘은 내가 향하게 되고 내 전 존재가 파악될 수 있는 자체를 말합니다. 틸리히는 이 존재 자체(Being-Itself)가 바로 나의 존재 근거요 내가 살게 되는 근거요 이 존재 자체가 바로 정통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3. 조직신학자로서의 틸리히

복음주의는 무슨 의미인지 아마 잘 아시겠지요. 본 홈피의 제 논문 가운데도 복음주의에 대해서는 자세히 정리되어 있으니 잘 살펴보세요. 여기서는 시간이 없으니 위 내용과 많은 복음주의 학자들(간하배, 한철하, 이성주, 서철원, 박해경, 이승구, 목창균 등)의 견해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정리하겠습니다.



1) 틸리히의 성경관

(1) 성경을 상징으로 봄
(2) 따라서 성경은 비문자화(Deliteralization)해서 보아야 한다고 봄.
(3) 성경의 역사성 부정


2) 틸리히의 신관

(1) 성경적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지 않음
틸리히는 분명 하나님(무한하신, 영원하신, 영이신, 사랑이신, 선하신, 인격적인, 창조자이신 하나님 등)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는 하나 그가 말하는 하나님이란 ‘존재’ 또는 ‘존재의 근원’(하나님에 대한 철학적 용어)으로서의 하나님이다. 이것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박태선의 감람나무 하나님이 성경의 하나님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2) 즉 그가 말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는 (어거스틴, 루터, 칼빈이 말하는) 성경적 복음적 신앙적 관점의 하나님이 아니며  그저 종교적 상징의 하나님이다.
(3) 틸리히의 하나님은 상징적 '자기 초월'이요 '탈 자기'(Ecstatic)이다(틸리히가 말하는 초월은 복음적 초월<스탠리 그랜츠가 말하는 그런 초월>이 아니다).
(4) 따라서 틸리히가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더라도 그것은 통일교가 쓰는 하나님이 우리와 다른 개념인 것처럼 복음적 하나님이 전혀 아니다.


3) 틸리히의 삼위일체론

(1) 정통적 삼위일체 신앙고백이 전혀 없음
(2) 신앙고백이 없으므로 그는 상징적, 변증법적 애매모호한 삼위일체론을 전개함
(3) 위격(Hypostasis)에 숫자적인 동일성의 의미를 부여하면 궤변이라고 봄.
(4) 삼위일체 교리에서 하나는 셋, 또한 셋은 하나라는 것은 가장 좋지 못한 교리라고 주장.


4) 틸리히의 기독론

(1)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수용(Expropriation)해서 죽었다고 봄.
(2)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문자적으로 믿는 것은 미신적 신앙이라고 봄.
(3) 예수의 부활은 상징인데 그것이 그리스도가 되게 만들었다고 주장.
(4)        //              그것이 교회를 형성하는 요소가 되었다고 주장.
(5) 예수는 새로운 존재(the New Being)이다.


5) 틸리히의 죄론

(1) 죄는 존재의 근거로부터 혹은 참 자아로부터 소외(소원해짐, estrangement)되는 것이라 봄.
(2) 아담의 타락은 역사적 사건이 아닌 본질로부터 존재로의 비시공적 이전이라고 철학적으로 설명.


6) 틸리히의 구원관

(1) 중생은 새로운 존재 속의 참여,
(2) 칭의는 새로운 존재를 수용하는 것
(3) 성화는 새로운 존재에 의한 변화의 상징
(4) 틸리히의 구원론은 살아계신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실존적 상황 아래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중생, 칭의, 성화라는 상징들을 묵상하여 새로운 자아로 깨우쳐지는 것
(5) 바르트나 틸리히는 죄 문제나 구원의 문제를 역사성이 없는 관념의 세계로 끌고 가고 있음



4. 틸리히의 삶

(1) 이혼과 탈선의 삶
(2) 노골적 무신론자 버트란트 러셀처럼 무분별한 성적(性的) 일탈로 인해(이 웹 사이트에는 어린이와 청소년들도 방문하므로 구체적 사례 제시를 제한합니다), 목사인 신학자가 오히려 오늘날 정신분석학자들이나 성 심리학자들로부터 연구 대상이 될 정도로 복음적 학자가 아니었음
(3) 복음적 목사, 신학자와는 전혀 거리가 먼 삶을 산 사람



5. 복음주의 관점에서 본 틸리히 종합 평가

1) 틸리히는 20 세기 많은 영향을 끼친 학자였음

‘신학자의 신학자’라고 불릴만큼 그의 사상은 깊고 매력적이면서 정통신학 용어를 모두 재정리하여 다르게 표현함. 평신도들이 그의 신학에 접근하기 어려운 계기가 됨. 스탠리 그랜츠와 로저 올슨의 말을 빌리면 이런 신학을 학술신학(academic theology)이라 합니다.


2) '심오한' 폴 틸리히와 전혀 다른 '적응의' 예수 그리스도

어렵고 난해하게 신학을 전개한 폴 틸리히와는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조와 구속의 진리를 간결하고 단순 용이(brevitas et facilitas)하게 모든 역사, 모든 민족과 인종, 모든 남녀노소, 모든 빈부귀천자를 막론하고 적응(accommodation)하심. 복음의 진리는 모두에게 알려져야 하므로. 틸리히는 예수 그리스도와 달리 난해한 비성경적 언어를 구사하여 기독교와 기독교의 교리를 묘사함으로써 당연히 현대신학자 소리를 듣게된 것이고 복음주의 신앙에는 큰 해악을 끼치게 됨.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교리를 종교다원주의에 맞게 교묘히 왜곡시켜 버림.



제 12강 몰트만 신학


몰트만의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몰트만의 창조자 하느님은 누구인가)


조덕영
창조신학연구소


A.들어가면서

  몰트만의 <창조자 하나님>을 다루는데 있어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문제점을 전제하고 접근하지 않을 수가 없었음을 미리 밝혀둔다.


1. 몰트만이 다루려는 하나님이 우리가 믿는 성경적인 하나님을 말하는 것인가? 즉 그가 여기는 하나님은 자신이 성경적으로 믿고 고백하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하나님인가? 아니면 자신에게 말씀하시지 아니하는 단순한 창조자 하나님인가?

2. 몰트만이 구사하는 Terminology가 우리가 현재 동일하게 받아들이고 인식할 수 있는 언어로 볼 수 있는가? 철학적, 신학적으로 정리되지 못한 한국어의 미숙성(未熟性)이 사변적(思辨的),철학적,신학적 전통을 이어온 독일어의 의미를 그대로 담아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어가 그러한 독일어의 의미를 담는데 한계를 지닌 이유가 번역의 모호함으로 이어져서 그런 것들을 더욱 심화시키지는 않았는가?

3. 성경이 창조주 하나님 인식이나 인간의 구원과 같이 심오한 접근을 요구하는 것들을 누구나 접근하기 쉬운 언어로 단순화(바울의 경우처럼)하여 전하는데 비하여, 뫁트만의 경우(다른 많은 신학자들도 그러한 사례가 많이 있지만) 마치 성경이라는 문학 작품을 평론하는 평론가의 말의 유희처럼 보여져서 대중의 접근을 어렵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B. 내용 요약

*몰트만은 신학적 창조론이 단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빈번히 다루어 왔다고 본다.
  하느님은 그가 창조하였고 유지하는 세계에 대하여 무엇을 의미하며 하느님의 창조라는 것은 세계에 대하여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해 몰트만은 이 우주론적인 문제를 다루기 전에 이 과에서 먼저 다음과 같은 신학적 문제를 다루고자 하였다

1)자기와 다르지만 자기에게 상응해야 할 세계의 창조자라는 것은 하느님에 대하여 무엇을 의미하는가?
2)그가 창조와 함께 원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는 창조를 어떻게 경험하며, 창조에 어떻게 참여하는가?
3)이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구약성서에 나타난 창조의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시작하기로 하자.


1. “태초에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느님”

1)성경의 창조에 대한 몰트만의 묘사

  이스라엘의 신앙이 거친 기나긴 사유의 과정을 요약한 것이다. 이 사유의 과정은 이집트와 바벨론 종교의 천지창조론과 대결하면서 이루어졌다.

2)‘바라’(bara)라는 동사

  제사장 문헌군의 전통에 있어서 오직 신적인 창조에 대해서만 사용되었다. 어떠한 인간의 유비도 거기에 상응할 수 없는 하느님의 창조에 대한 표현으로서만 사용된다. 그의 영역에 있어서의 생성을 표현한다.(출애 34,10:민수, 16,30 : 시편 51 12 등). ‘바라’는 거기에서부터 무엇이 만들어 질 수 있는 재료의 목적격과 함께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하느님의 창조가 절대적이며 전제가 없는 창조임을 말하며 창조는 현실적으로나 잠재적으로나 어떤 다른 것 안에 들어 있거나 현존하지 않는 철저히 새로운 것임을 표현한다.

  성경은 “창조하다”(bara)와 “만들다”(asah)를 분명히 구분한다.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하다”는 창조 전체를 표현한다. 이에 비하여 “만들다”는 2절과 함께 시작하여 안식일과 함께 끝난다 : “하느님께서는 여섯째 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창세 2,2). ‘만들다’는 어떤 일에 그의 특정한 적응이 함께 주어지는 사물의 합목적적인 제조를 표현한다. 창조의 사역의 신적인 만듦은 인간의 노동에서 그의 아날로기아를 발견한다. “안식일의 계명은 하느님이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는 데에(출 20, 11: 31,17) 근거하지 하느님이 그것들을 창조하였음에 근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만듦은 형성과 제조이므로 인간의 이 노동에 대한 모범일 수 있지만 신적인 창조와 인간의 행위는 비교될 수 없기 때문이다”

3)“태초에”라는 표현

  이 표현은 태초가 그 속에 정립되어 있는 절대성 속에서 시간 속에서 일어날 모든 사건들에 대한 절대적 전제 조건을 시간의 태초라고 의미한다. 피조물의 시간은 빛과 낮과 밤의 주기의 생성과 함께 시작한다. 창조자가 만드는 모든 창조의 사역들은 “하느님이 말씀하시고……, 하느님이 나누셨다”는 말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연속하여 일어난다. 창조 자체만이 그것이 그 다음에 일어나는 그런 전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단 한 번에 일어났으며 모든 면에서 처음으로 일어났다. 태초는 아무 전체 없이 정립되어 있다.

4)‘무로부터의 창조’ (creatio ex nihilo)

  창조에 대한 나중의 신학적 해석이 성서적으로 “창조”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적절히 표현하는 말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언제 어디에서 창조하든지간에 하느님은 아무 전제 없이 창조한다. 그의 창조를 야기하는 아무런 외적인 필연성도 없으며 창조를 결정할수 있는 아무런 내적인 강요도 없다.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공식은 배타적인 공식이다. 무(nihil)는 한계의 개념을 다시 말하여 “없는 것으로부터”, 즉 순수한 무로부터를 의미한다. “부터”라는 품사는 미리주어져 있는 그 무엇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물질을 배제한다. 본래 이 표현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다시 말하여 “부터”라는 품사는 “없는 것”이 보여질 수 있고 “없는 것”이 발견될 수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게 한다.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공식과 함께 “무엇으로부터”라는 반대말이 부인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무엇”이 부인되어야 할 뿐 아니라 “부터”라는 말도 본래 누락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로부터”라는 공식은 단지 “무엇”만을 부인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계속 질문하게 한다 : 그것을 통하여 모든 특정한 것이 부인되고 배제되어야 할 이 “무‘는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가?

  몰트만에게 있어 세계는 미리 주어져있는 물질이나 신적인 본질로부터 창조되지 않았다.

세계는 신적인 본질의 것이 아니며 그의 영원한 존재로부터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러면서 세계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의지로부터 존재하게 되었다는 묘사는 조금 이상하다. 몰트만은 아인시타인이 묘사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였는가’라는 명제에 사랑을 포함시켜놓았다. 그의 사랑은 무아(無我)의 사랑이다.


5) 창조의 과정

  ‘말씀을 통한 창조로 기술되고 있다 :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말씀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창세 1,3). 물론 “하느님께서 보았다”, “하느님께서 나누었다”, “하느님께서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만드셨다”, “하느님께서 축복하셨다” 등과 같은 일련의 다른 활동들도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곳에서 하느님은 그가 말하는 말씀을 통하여 그의 창조를 “만든다.” 창조자와 그의 창조를 연결시키는 것은 창조의 말씀이다. 창조자와 그의 창조를 결합시키는 것은 먼저 그의 계명, 그의 명령, 그의 지시, 그의 판단이다. 하느님이 말씀하심으로써 창조한다면 창조된 것에 대한 그의 자유가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있다.

  창조의 과정에 있어 인간의 특징은 혼에 있지 않으며(동물에게도 혼은 있다) 하느님의 형상에 있다.

  과정 신학이 카오스로부터의 창조를 말하나 이것은 세계의 과정을 시작이 없는 것으로 돌리게 될 위험이 있다. 그럴 경우 창조론이 아니라 유지론이나 질서론만 남게 된다.

6)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창조적인 관계

세계에 대한 그의 유지하는 관계로 폐기시키는 일은 타당하지 않다. 이러한 일은 슐라이에르마허에게서 일어났다. 이와 같은 세계의 창조가 하느님의 보편적이고 현재적인 세계 통치로 되어버릴 때 세계는 유한한 창조가 아니라 시작이 없으며 하느님과 같이 영원한 세계로 될 것이다. 영원이 없이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듯이 시간 없이는 영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느님 없는 세계 없듯이 세계 없는 하느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활동은 오직 세계 안에서 생각될 수 있지만 그러나 세계는 하느님의 활동 안에서 생각될 수 없을 것이다. 태초의 창조가 없다면 새로운 창조도 없을 것이다.“ 새 창조는 새로운 인간성의 도덕적 창조로 해석되어야 한다. 모든 사물들의 새 창조가 없다면 세계를 파멸하는 무와 맞설 수 있는 것도 전혀 없을 것이다.


2.자기를 창조자로 결정한 하느님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하늘과 땅의 ‘창조자’로 결정하였다. 창조는 그의 ‘창조의 결정’에 근거하며 창조의 결정은 하느님에게는 물론 그의 창조도 해당한다. 그것은 밖을 향한 행위이기도 하지만 안을 향한 행동이기도 하다. 여기에 있어서 하느님의 안을 향한 행위가 밖을 향한 행위보다 선행한다. 다시 말하여 하느님은 세계를 창조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세계의 창조자로 결정한다. 이 자기 결정은 실질적인 의지의 결단의 반성적 구조와 인격적 결단에서 인식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하느님은 세계를 ‘창조하기로 자기를’ 결정한다.

  폴 틸리히가 대변한 신적인 생명으로부터 모든 피조물들이 생겨났다는 유출설은 고대 플라톤적이다.

  이에 대해 ‘개혁교회의 결의론’(Dekretenlehre)에 의하면 하느님은 오직 삶이다 그는 그에게 본질적인 동시에 창조에 있어서 하느님의 작용의 절대적 원인이 되는 활동 없이는 생각될 수 없다. 하느님 안에 내재하며 그에게 본질적인 활동은 그의 본질의 영원하고 변할 수 없는 결정이다. 이 결정의 결과는 창조의 결정이다. 이 결과는 결정 자체로부터 단지 개념적으로 구분된다. 이것은 하느님의 이 결정이 하느님의 본질로부터 사실상 구분될 수 없으나 단지 개념적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과 같다. 개혁교회의 결의론은 하느님의 활동과 본질을 동일시함으로써 ‘하느님의 절대적 능력’에 대한 유명론의 사변으로부터 구분된다. 다시 말하여 하느님의 본질은 그의 영원한 활동이다. 그러므로 창조에 대한 그의 결정은 자의적 결정이 아니라 하나의 결정이다.

  개혁교회의 결의론은 한 번도 태초의 창조만을 보지 않았다. 창조는 하나의 시작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이루어질 창조의 완성은 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즉 하느님은 영원히 창조적인 하느님이 아니라 시간과 영원 속에서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하느님이다. 칼 바르트는 이 전통을 받아들여 그의 그리스도론적 선택론에서 창조적으로 수정하였다..

  ‘결의론’은 하느님이 절대 주체라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느님의 의지와 함께 시작한다. ‘유출설’은 이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이 최고의 실체라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느님이 본질과 함께 시작한다. 결의론은 신적 의지의 피조물들을 말하는 반면 유출설은 신적 본질의 넘쳐 흐름을 말한다. 유출설은 영지주의적이며 신플라톤 철학의 근원에 속하기 때문에 그것은 교회의 신학에 의하여 버림을 받거나 아니면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되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출설에는 하느님의 창조를 완전히 이해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진리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단지 폴 틸리히가 대변한 형태에 따라 이 요소들을 받아들이도록 하자.

  틸리히에 의하면 “신적인 삶”과 “신적인 창조”는 하나이다. 신적인 삶은 본질적으로 창조적이며 충만하게 그 자신을 실현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여전히 창조자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창조하기로 “결단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느님의 삶 “속에” 있는 사건이 아니라 바로 그의 삶과 “동일하다.” 창조는 우연도 아니고 필연은 아니며 오히려 하느님의 “운명”이다. 그러므로 창조론은 시간적 시작에 대하여 말할 수 없으며 하느님과 세계의 근본적 관계에 대한 진술들만을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유한성의 의미는 그의 피조성에 있다. 이 의미에 대한 신학적 대개념은 신적인 창조에 있다. 신적인 삶은 그의 영원한 본질에 다라 창조적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 영원한 창조를 상징하기 위하여 시간의 양태를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세계를 ‘창조하였으며’, 세계를 ‘창조하며’, 세계를 ‘완성시킬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신적인 삶의 창조적 과정”에 있어서 단지 피조물과 관계된 면만을 나타내고 있다. 피조물이란 다음의 내용을 뜻한다 : 즉 “신적인 삶의 창조적 근거에 뿌리박고 있으며 자기 자신을 자유 가운데에서 실현함을 뜻한다. 여기에서 틸리히는 창조론의 진술들을 분명히 무시간적인 상황에 집중시키고 있다. 이 상황 속에서 하느님은 모든 유한한 존재들과 창조적으로 관계하며 유한한 존재들은 그들의 유한성을 피조성으로 이해한다. 그렇다면 일회적 행동과 그것의 결과로서의 창조는 창조자와 피조물의 영원한 상호 관계 뒤에서 사라지고 만다.

  끝으로 결의론과 유출설을 비교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이론을 적절하게 혼합시키려고 할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하느님을 보다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해야 할 것이다. 결의론에 의하면 하느님은 자기를 창조에로 ‘떼어 낸다’. 유출설에 의하면 신적인 삶은 자기를 ‘개방한다’. 창조의 결정이 “본질상의 결정”이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다 : 하느님은 그가 행하는 결단속에서 자기를 개방한다. 


3. 무로부터의 창조
 
어거스틴 이후 그리스도교 신학은 하느님의 창조의 사역을 ‘밖을 향한 하느님의 행위’, 다시 말하여 ‘바깥을 향한 하느님의 활동’, ‘바깥을 향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행위’, ‘바깥을 향한 하느님의 행동’라고 불렀다. 신학은 하느님의 내재적 삼위일체의 관계들 속에 일어나는 안을 향한 ‘하느님의 행위’를 이것으로부터 구분하였다. 하느님의 안과 밖의 이 구분은 너무도 자명한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한 번도 다음과 같은 비판적인 질문이 제기되지 않았다 : 전능하고 어디에나 계신 하느님이 도대체 하나의 “밖”을 가질 수 있는가? 신학이 받아들인 ‘하느님 밖에’은 하느님에게 하나의 한계를 설정하지 않는가? 누가 하느님에게 이러한 한계를 설정할 수 있는가? 하느님의 밖에  어떤 영역이 있다면 하느님은 어디에나 현존하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의 이 바깥은 하느님과 같이 영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하느님밖에 있는 것은 하느님에게 적대하는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느님의 자기제한에 대한 카발라적인 이론은 그리스도교 신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생각을 한 걸음 더 발전시키기로 하자.

1. 하느님은 그의 현존을 거두어 들임으로써 그의 창조의 자리를 만든다.
2. 하느님은 창조를 가능케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자신에게로 물러난다.”
3. 하느님은 그가 마련한 “원초의 공간” 속을 향하여 창조적으로 활동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련하여 ‘무로부터의 창조’에 대한 마지막 해석에 도달한다 : 하느님이 그의 창조를 무로부터 지으시고 죄에도 불구하고 그의 창조를 버리지 않으시며 오히려 창조의 구원을 원한다면 그는 그 자신의 아들의 파송과 헌신 속에서 ‘파괴하는 무’에게 자기를 드러낸다. 그리하여 무를 자기 안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통하여 극복하고 이러한 방법을 그의 창조에게 현존과 구원과 자유를 선사하고자 한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세계사적인 무’도 부활의 빛으로 포괄되는가? 여기에서 아우슈빗츠와 히로시마의 경험들에서 오는 질문들이 제기된다. 이 질문들은 아무 답변도 받아 들이지 않는데 이 질문들은 사실상 저항이기 때문이다. 이미 ‘헤겔’에 대해서도 어떤 변증법에서도 “가장 잘 봉사할” 수 없는 부정적인 것이 있었다. 그러므로 헤겔은 “해결되지 않은 모순”, 곧 페로폴네소스 전쟁, 삼십 년 전쟁과, 다른 대량학살들은 그의 변증법에서 제의시켜 버렸다. ‘에른스트 블로호’도 마이다네크의 소각로에서 냉혹하고 무의미하며 파멸시키는 무를 볼 수 있었을 뿐이다 : “죽지만 그 다음에 필연적으로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종자가 있다. 그것은 짓밟혀서 이 부정의 어떤 긍정적인 부정도 가져 오지 못한다.

  객관적이며 현실적인 가능성들과 결합하는 투쟁적인 희망만이 파괴하는 무의 영역들을 억누를 수 있다. 그러나 삶에 대한 정열과 무의미한 죽음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 부정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본래 마니교적인 성격의 것이다. 이 생각과 함께 무는 “억제될 수”있지만 지향되거나 극복될 수 없다.

  그리스도교의 부활 신앙은 이것을 넘어설 수 있는가? 전쟁과 대량학살에 대한 투쟁의 실천에 있어서 부활 신앙은 이것을 넘어설 수 없다. 그러나 죽은 자들을 일으키는 하느님에 대한 희망에 있어서는 넘어설 수 있다. 부활 신앙은 인간적으로 무엇을 희망할 수도 없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바로 그 때에 하느님을 지향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었던 부활 신앙의 상황이기도 하였다. “죽은 자들의 해골이 가득한 골짜기 지면”에서 에스겔은 “주의 말씀”을 들었다 :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에스 37, 1 이하). 저형을 당한 그리스도의 부활동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의 비-존재에 내재하는 존재에 잠재성이 아니라 하느님의 새 창조의 기적이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은 세계사적인 무를 새 창조의 빛 아래에 가져 온다.


4. 삼위일체론적 창조론

1) 우주적 그리스도 : 그리스도가 모든 창조를 위한 죄된 인간과 “노예화된 피조물”을 위한 구원의 근거라면, 그는 모든 창조와 인간과 자연의 실존을 위한 근거이기도 하다.

2)  ‘창조자로서의 영’ : 신약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구원의 종말론적 경험은 영의 부음과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능력의 경험과 결합되어 있다. 성령의 은사는 영광의 “보증”이다(고후 122 : 5,6: 에페 1,14). 성령의 능력은 새 창조의 능력이다.


5. 우주적 성령

*창조 안에 있는 성령의 현존과 활동 방식

1)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성령의 첫 경험은 ‘창조자의 능력의 경험’이다. 신앙인은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태어나며(오한 3,5), 그리스도 안에서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17).

2) 성령의 둘째 경험은 같은 근원에 속한 것인데 그것은 달리는 극복될 수 없는 사회적, 종교적, 자연적 한계를 극복하고 이루어지는 ‘사귐의 경험이다.

3) 자기의 소명과 자기가 받은 성령의 은사의 ‘개인화에 대한 경험’은 이 사귐의 경험과 동일한 근원에 속한 것이다. 각자에게 다른 성령의 은사가 내린다.

4) 끝으로 성령의 임재에 대한 이 경험 속에서 희망이 확실해진다. 왜냐하면 선취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새로운 창조의 미래’, 영광을 향한 우주의 거듭납, 모든 분리된 피조물들의 축복받은 창조의 사귐,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어 있고 성령 안에서 새로워진 창조의 직접적인 하느님과의 사귐이 선취되기 때문이다.

*자연 속에 있는 우주적인 영의 활동 방식

1) 영은 물질과 살아 있는 것의 모든 영역 속에 있는 ‘창조성의 원리’이다. 그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하며 물질적이며 살아 있는 유기체들의 새로운 기획들을 그들 속에 선취한다(=앞당겨 온다 : 역자). 이러한 점에서 영은 진화의 원리이다.

2) 영은 ‘전체론적 원리’이다. 진화의 모든 단계에서 그것은 상호작용과 이 상호작용들 속에서의 일치와 상호간의 침투와 동지적이고 연대적인 삶을 창조한다. 하느님은 영은 창조의 “공동체영”이다.

3) 영은 상이한 차원에 속한 특별한 물질의 기획들과 삶의 기획들의 ‘개체화’와 분화의 ‘원리’인데 이것은 위의 원리와 동일한 근원에 속한 것이다.

4) 끝으로 모든 창조는 목적에 있어서 개방된 피조물들이다. 그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그들의 가능성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공통된 미래를 향하고 있다. 이러한 ‘목적성의 원리’는 모든 개방된 물질의 체계들과 삶의 체계들 속에  내재하고 있다.


C. 몰트만이 본 창조자 하느님

  몰트만의 창조주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이 나오기 이전 1967년 그가 쓴 <희망의 신학(The Theology of hope)>과 1969년 저술한 <종교와 혁명과 미래(Religion, Revolution and the future)>에서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살펴봄으로서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에서 다루고자한 자연의 신학에 배경이 되는 창조자 하느님을 어떤 의미로 표현하고자 한 것인지 살펴볼 수 있다고 본다.

  첫째,몰트만에게 있어 하나님은 미래로 나아가는 하나님으로서 시간의 일부이지 완전한 하나님으로 보이지 않는다. 즉 몰트만에게 있어 하나님이란 “미래를 그의 본질로 가지는” 하나님일 뿐이다. 그러기에 몰트만에게 있어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사실 이곳 창조자 하느님에서 다루고자 했던 하느님 자신보다는 그가 미래에 어떤 분이 되실 것인지에 관심이 많은 것같다.

다시 말하면 그가 과거와 현재에 누구이신가 하는 것은 몰트만의 관심 밖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몰트만의 하나님은 절대적이신 분이 아니시다. 그느 sekswl 미래에 대하여 약속하시는 신실의 하나님이요 자신이 미래에 의하여 결정될 뿐이다.

  둘째로 창조와 관련된 종말의 사상에 있어서도 몰트만의 관심은 전통적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대망이 아니다.  기독교의 종말의 개념은 사실 이미 창조의 때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완성이 이미 예언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몰트만은 이미 우리와 다른 창조자 하느님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에게 있어 하느님이란 영원 가운데 존재하시는 초자연적인 분이라고 보여지지 않는다. 단지 미래에 대해 열려진 것이요 미래의 자유일 뿐이다. 그런 하느님이라면 이미 그가 다루는 참조자 하느님은 우리의 믿음의 영역을 벗어난 분으로서의 하느님을 그는 다루고 있음이 분명하다.

  셋째,복음적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종말론의 전제로 믿는데 반하여 이제 미래의 소망으로 단순히 앉아 계신 하느님이기에 그에게 있어 갈보리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그래서 그는 갈보리를 통한 새예루살렘을 바라보지 말라고 말한다. 오히려 미래를 통해 갈보리를 보아야 한다. 전통적으로는 예수의 부활이 마지막 부활의 근거이나 몰트만에게 있어서는 거꾸로 바지막 부활이 예수 부활의 근거가 된다<J. Moltman, Religion,Revolution and Future(N.Y:Charles Scribner's Sons, 1969), 52.>. 그렇다면 여기서도 창조자 하느님은 별 의미를 상실하게 되어 버린다.



D. 나가면서

  결론적으로 몰트만의 하나님이 얼핏 우리가 믿는 정통주의적인 하나님과 별 차이가 없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몰트만이 자신이 서술한 창조자 하느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보여진다. 몰트만에게 있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 시에 주신 일정한 형식이나 구조가 없다.

이것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입장과는 전혀 다르다. 몰트만에 따르면 미래는 자유를 말하며 자유는 상대성을 의미한다(Religion, Revolution and Future, p.138.). 몰트만의 말대로 미래를 실현시키기 위해 사용될 권위주의적인 형식이 설정되지 않았다면 그런 하나님은 몰트만이 비판하는 기계론자들의 하나님과 무슨 차별이 있겠는가?

  더욱이 몰트만의 종말론의 중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말하는 창조자 하느님에 대해 회의를 갖게 한다.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 그가 그리는 희망이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궁금하다.

  몰트만이 바라보는 성령도 인격적인 하나님으로서의 성령보다는 행동을 요구하는 성령으로 느껴진다.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 지향의 의지가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몰트만의 행동 강조가 해방 신학으로 이어짐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보여진다. 그렇기 때문에 몰트만에게 있어 미래의 최종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현시가 아니고 지상에 건설될 이상향이다. 사도 바울과 달리 몰트만의 하나님 나라는 정치와 혁명으로 나타날 평강인 것이다.

  몰트만의 관심이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인가에서 이탈되어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가 다루는 창조자 하느님은 눈뜬 장님처럼 스쳐가는 하나님이거나, 최소한 몰트만 스스로 하나님을 그저 무신경하게 다루고 있다고 보여진다.

  몰트만이 말하듯 단지 미래에만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이미 그가 말하는 창조자 하느님은 그가 아무리 현학적 언어를 동원해서 창조자 하느님을 노래해도 그것은 우리에게 공허한 메아리로 들릴 뿐이다.

  몰트만은 과거에 주어진 역사적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는 듯한 인상(smith의 책 A Handbook of Contemporary Theology를 인용하여 목창균 교수가 『현대신학 논쟁』(두란노서원,1995)에서 희망의 신학 결론(329쪽)에 서술)을 늘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이다.
 


조덕영ki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