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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04 21:24
기독교 변증학 교재 2(악과 고통에 대한 해석-신정론의 이해)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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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변증학 2(강의 자료, 신정론의 이해)


Ⅳ.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이란 무엇인가?(악의 기원과 신정론)

하나님이 악을 만드셨는가? 하나님이 만드시지 않았다면 선하신 하나님은 왜 악을 내버려두시는가?

신정론에 대해(조덕영)





A. 신정론이 대두되는 이유

“악(惡)은 누가 만들었나? 성경의 하나님이 모든 것의 창조주라면 악도 결국 하나님의 창조물 아닌가? 도대체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악이 존재하는가?”

이 문제는 오랫동안 신학과 철학의 주된 주제 중 하나였다. 물론 지금까지 지속되는 논제이기도 하다. 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말하는 ‘악(惡)’에는 살인이나 강도·강간 등 악한 행위와 함께, 지진이나 쓰나미 등의 자연재해, 심지어는 질병이나 가족·친지의 죽음 등 자신에게 닥쳐오는 불행(不幸)마저도 포함된다. 필자의 동서가 기독교 신앙과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이유로 “왜 착하시고 예수 믿던 장모님께서 주일날 억울하게 버스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게 되었는가? 따라서 나는 예수 믿을 수 없다”고 하던 말이 기억난다. 

이 문제는 오늘날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질문일 뿐 아니라, 어쩌면 기독교인들에게도 최대의 ‘물음’ 중 하나이다. 나아가 ‘죄’를 저지르는 사람까지도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나” 라며 하나님이나 부모님께 공을 떠넘기고 하나님과 부모님을 향해 삿대질을 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이 신정론적 물음의 당위성을 제공한다. 그러기에이 문제는 역대 최고 철학자들의 질문이기도 했다. 당연히 이 문제는 신학적으로도 대단히 심오한 질문이다. “하나님은 정말 악을 예비하셨는가?”하는 ‘예정론’과도 맞닿아 있다.

이렇듯 “하나님은 왜 악을 방치하시고 보고만 계시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학문이 바로 신정론(神正論)이다.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론에서 ‘너무도 정교한 이 세상을 보라 어찌 창조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할 때 어떤 사람들은 전혀 반대로 말 할 수 있다. 즉 ‘이 온 세상의 모순과 불합리와 불공평과 아비규환을 보라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라고 반론을 펴는 것이다. 간혹 지적설계나 창조론자들이 춘하추동의 절묘한 계절 변화를 창조의 증거로 비유하는 경우가 있다. 만일 100여년 전 하와이에 사는 원주민 신앙인이라면 아 하와이의 이 변하지 않는 온화한 기후야말로 창조의 증거라 할 것이다. 이렇게 서로 상반되는 논리로 반대이론을 펼치는 게 사람의 논리이다.

사람들은 억울한 성추행 피해, 선량한 사람의 억울한 살인 피해, 선교사의 피살, 선량한 사람이 당하는 많은 억울한 일들, 이유를 모르는 암의 고통 등등에서 악의 문제에 대한 질문을 신학과 철학에 던지기 마련이다.

바로 신정론에서 이런 고민이 발견된다. 이것은 우리가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이기 때문에 생기는 한계이기도 하다.
 



B. 신정론의 뜻

신정론은 "신(theos)"과 "정의(dikee)"를 의미하는 두 헬라어 낱말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말로서, 이 세계에 있는 수많은 악에 대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뜻한다. 이 문제는 하나님에게 능력과 선함을 동시에 귀속시키려 하는 모든 형태의 유신론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신정론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딜레마로 표현될 수 있다. ‘하나님은 악을 막을 수 있는 데도 막지 않거나, 아니면 막으려 하지만 막을 수 없거나이다.’ 여기서 만일 후자가 옳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고, 전자가 옳다면 그는 자비하지 않다는 논리이다. 악의 문제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벌써 플라톤 때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가장 역설적인 형태의 신정론은 기독교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기독교가 창조의 선성을 이야기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십자가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C. 신정론의 전제

신정론은 직접적인 신존재 증명은 아니다. 다만 신존재 증명을 하다보면 부딪히게 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신정론이 물어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기본 전제가 확보되어야 한다. 첫째로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정론은 제기 되지 않는다. 둘째, 신이 선하다고 할 때 그 선함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선함과 일치해야 한다. 인간이 가진 선악개념과 신이 가진 선악개념이 다르다고 한다면 신정론 이전의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나게 된다.


D. 신정론과 철학

칸트는 신정론을 “세계 안에 존재하는 악으로 인해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고소당해 이성의 재판정에 서게 된 하나님을 변호하는 논리”라고 했다. 칸트는 <모든 철학적 신정론 시도의 실패에 대하여>를 쓰며 전통적인 신정론을 비판한다. 칸트가 볼 때, 전통 신정론으로는 하나님의 정당성이 인정되기는 커녕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필연적으로 세계 안에 존재하는 악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고 지적한다. 그는 악의 근원을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자유에서 찾으려 한다, ‘인간이 악하다’는 칸트의 명제는 “도덕률을 인식하면서도 그때마다 어기는 것을 준칙으로 삼은 것”을 뜻한다. 칸트에게 있어 악은 끊임없이 노력하며 악을 극복해야할 대상이다. 칸트에게 있어 신과 신앙은 단지 도덕률로 귀착되는 것이다.

천재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악의 원인을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의 불완전성 때문으로 분석하고, 세계 안에서 겪는 모순적인 부조화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적극 변호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인과율적이며 권능있는 행위인 동시에 특별한 의도와 목적에 따른 행위였고, 하나님은 ‘모든 가능한 것 가운데 최상의 세계’를 만드셨다. 그럼에도 존재하는 악에 대해서는 어거스틴과 같이 “인간이 죄 짓는 것을 원하지 않고 억지로 죄 짓게 하지도 않으시지만, 단지 허용하실 뿐”이라고 보았다. 라이프니츠는 팔방미인적 천재답게 이 문제에 대해 악은 선을 위해 허용된다거나 더 큰 선을 위한 단순한 수단이라고 하는 등 해석에 있어 평범한 사람들이 쉽게 착안할 수 없는 ‘사변적’ 비약을 하고 있다. 철학자들이 보면 낯설게 보일지 모르나 신학적으로 보면 라이프니츠의 이해가 수긍이 가는 측면도 있다.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Alfred N. Whitehead)의 영향을 받은 하트손(Charles Hartshorne)은, ‘악의 문제를, 전능하고 아무도 능가할 수 없고, 동시에 자비로운 하나님이라는 전통적인 신 개념의 틀 속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보고 있다. 그는 신을 만유내재신론적 관심에서 신이 피조세계와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인간 또는 사물과 함께 고통 받는 존재로 끌고 나온다.

한스 요나스는 칸트가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다’는 지나치게 낙관적 견해에서 출발했다고 믿는다. 유태인이었던 그는 아우슈비츠 대학살을 경험한다. 그의 <아우슈비츠 이후의 하나님 개념, 한 유대인의 소리> 연설문에서 고전적인 ‘고난’의 의미가 아우슈비츠에 직면해서는 더 이상 효력이 없음을 증언하고 있다. “아우슈비츠가 일어날 수 있게 했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질문한 그는 신앙을 고수하기 위해 ‘하나님의 완전한 자기 포기’, 즉 ‘고난당하는 하나님’, ‘되어져 가는 하나님’, ‘염려하는 하나님’을 외친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 아니다. 한스 요나스가 볼 때 하나님이 절대 선하고 전능하다면, 세계 안에 존재하는 악은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E. 신정론과 기독교

1. 신정론과 성경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기했던 가장 어려웠던 문제는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이니까?"(렘 12:1)라는 것이었다. 이 질문은 선하신 하나님에 의해 통치되는 이세상과 더불어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납득하고자하는 신정론적 질문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왜 연약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갈대아 족(바벨론)이라는 힘센 악의 몽둥이로 치시는지 질문한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이나, 악인의 세상적 형통과 심지어 죽을 때까지도 강건하며 고통 없고 재난 없는 삶에 대한 시편 기자(시 73)의 도발적 질문은 모두 신정론적 질문이다. 


2. 신정론과 십자가(루터와 몰트만)

신학은 철학자들의 물음에 주로 ‘십자가’의 신정론으로 나아간다. 루터는 늘 참된 하나님 인식에 이를 수 없는 세상적 사변의 한계를 논증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만 우리에게 열리는 하나님 인식을 드러낸다. 루터는 사탄 속에서도 일하시는 ‘숨어계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 악과 고난 역시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선택과 유기의 근원자이신 하나님의 가면(Verba Dei)으로 풀이한다. 루터는 하나님은 ‘고유한 사역’을 이루기 위해 ‘낯선 사역’을 통해 일하신다며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행하시는지 묻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루터는 자신의 사유를 탁월한 문학적 언어로 전개하고 있다. 우리 한국의 신학이 깊이가 없거나 발전이 없는 것은 문학적 사유의 부족도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신정론 같은 깊은 사유가 바탕이 된 신학적 문제를 다루는 루터의 능력을 통해 왜 하나님이 그를 종교개혁의 선봉장으로 부르셨는지 조금은 깨닫게 된다. 루터를 비평하려면 최소한 루터와 맞먹는 문학적 감수성이 필요한 것이다. 루터의 논증에도 결함은 보이는데 마치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논쟁처럼 “결국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게 아닌가”라는 고민이 생기게 된다.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아우슈비츠에서 주기도문이 고백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 자신이 아우슈비츠에서 순교자들과 함께 고난받지 않았더라면, 신학은 불가능하다”고 되뇌인다. 요나스가 아우슈비츠 때문에 하나님의 전능성을 포기했다면, 몰트만은 하나님 표상을 수정한다. 그는 하나님을 ‘무감정의 신’이라는 오해에서 건져내며, 귀납적 추론을 도구 삼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무신론의 전통도 비판하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모든 기독교 신학의 중심”이라는 그는 ‘고난 안에 계신 하나님’, ‘하나님 안에 있는 고난’을 역설한다. 하지만 “고난을 하나님 안에 수용함으로써 악을 하나님이 책임지지 않는다는 주장”이 그리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여전히 이 문제는 어려운 주제인 것이다.


3. 신정론과 종말론

신정론을 종말론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도 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모든 불의는 사라지고 눈물과 고통과 죽음조차 없는 낙원이 기다리고 있으며 악은 당연히 사라질 것이다. 어찌 보면 악의 문제는 해결된 듯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렇다하더라도 지옥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은 어찌하느냐 하는 문제가 여전히 풀리지 않게 된다. 종말론적 미래에 모든 것을 미루어 놓으면 해결될 듯 보이던 것이 지옥의 영벌 문제에 부딪히면 여전히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힘써 아는 일(knowing God)이란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알수 있다.



4. 신정론과 칼 바르트

기독론 중심의 바르트는 신정론도 기독론에서 출발하고 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하나님이 피조물과 더불어 맺으시는 언약 의지로 보고 있다. 바르트가 볼 때 인간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말씀 사건을 통할 때 악의 문제조차 해결의 근원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고난을 경험하고, 실존적 피조물이기에 상처와 위험을 겪기 마련이다. 바르트는 이를 죄 때문이 아닌 ‘무(無)’로 구분하고 있다. 이로써 악과 고난을 오로지 인간의 타락 탓으로 돌리거나 인간의 도덕문제로 제한하는 관점을 저지한다.

하지만 바르트는 인간의 불신앙은 하나님의 전체 화해 사역을 부정하는 근본 죄악이라며 창조의 어두운 면에서 겪는 모든 고난을 인간의 죄와 연관시키기도 한다. 바르트의 신학은 간단하지 않으며 그리 용이하지도 않다. 한국 최고의 신학자 중 한분이신 박윤선 박사께서 바르트가 복음적인지 아닌지를 살펴 볼려고 평생을 꾸준히 바르트를 연구하고 숙고하셨을 정도로 바르트 신학의 난해함`은 신정론에도 여전히 적용될 수 있다.


5. 악과 고통에 대한 신학적 단상

1) 사랑이신 하나님의 고뇌(요일 4:16)

2) 자유의지의 부산물, 필요악?

3) 악과 고통 뒤에 있는 사단(욥기, 왕상 22장)

4) 고통을 통해 악을 제어

5)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는 도구

6)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애 3:22)

7) 신자의 보호(마 13: 29-30)

8) 환난은 성숙의 계기가 된다

9) 악과 고통이 없는 세상에 대한 반증

10)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들

11) 악과 고통에 대한 종말적 이해

12) 악과 고통에 대한 삼위일체 중심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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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창조 신앙으로 본 고통과 고난의 신비(히 13:10-15절)   


가. 들면서

20세기 들어 지난 1백 년 동안 과학은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사람들에게 사람에 대한 많은 지식을 제공했다. 사람 몸의 구조와 기능에 대해 알게 되었고 사람의 마음과 생각의 깊이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생각과 활동의 주체인 사람의 두뇌에까지 사람들은 조금씩 신비를 캐기 시작하였다. 겨우 지름 15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 인간의 뇌는 백과사전 1천만 권 분량의 책이 들어갈 수 있는 용량을 지녔다.  인간의 뇌는 3백만 년 이상 책을 보고 공부를 해도 다 채울 수 없는 수퍼 컴퓨터의 용량과 같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사람의 혈관은 어느 전자 회로보다도 정교하고 길어서 혈관의 길이가 지구를 두 바퀴 반을 돌 수 있을 만큼 길다. 하나님이 우리 사람 각자에게 주신 설계도인 유전자는 모두다 펼쳐놓으면 그 길이가 지구에서 태양을 10번이나 왕복할 수 있을 만한 길이가 된다. 심장은 평생 평균 25억 번을 실수 없이 고동치면서 평생 동안 40킬로 미터를 줄지어선 탱크로리를 다 채울만한 피를 쏟아낸다. 인간은 이제 복제 인간까지 생각해 낼 만큼 사람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게 되었다. 사람은 마음과 육체의 많은 부분들을 치유하고 개선할 수 있는 정보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아직도 그 미스터리를 풀지 못하는 것이 있다. 바로 고통과 고난의 문제이다. 역사를 통해 인간은 죽음을 포함해서 고난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도 진전된 해답을 찾지 못했다. 아무도 고난을 즐기는 자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고난은 조금도 감소되지 않고 있다. 성경도 “인생은 고난을 위해 났나니 불티가 하늘로 올라감갔다”고 욥기서의 저자는 탄식을 하고 있다.

더구나 이 고난과 고통은 너무 주관적이고 사람마다 다양한 경험이어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다. 도대체 이 고통과 고난이란 무엇일까? 고통에 대해 가장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먼저 류마치스 환자들이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나온 Elaine Scarry가 쓴 <The Body in Fain>이라는 류마치스 환자들의 경험을 쓴 책에 보면 <마치 송곳 끝으로 꼭꼭 찌르는 것 같다>, <칼로 뼈를 깎는 것 같다>는 등 자신의 고통의 상황을 말하고 있다. 어느 정도 설명이 되나 아무도 그 경험 자체가 어떤 것인지를 말하지는 못한다. 이 같은 고통의 호소는 당하는 사람의 언어(language of agency)이지 다른 사람이 느끼지는 언어로는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필자인 내가 그 류마치스의 고통을 당한 사람이다. 나 또한 그 류마치스의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알릴 수 없다. 나는 그저 ‘내 류마치스의 고통이 내가 일생 동안 앓았던 가장 고통스러웠던 감기와 몸살과 독감을 합친 것 같은 고통이었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뿐이다(의사가 못 고친 나의 이 병을 하나님께서 고쳐 주셨다!!!). 그러니 아마 류마치스의 고통을 알고 싶다면 여러분들이 가장 크게 앓았던 독감과 감기와 몸살을 종합하여 상상하면 된다.

또한 사람에게는 동물과 달리 정신적인 괴로움과 육체적인 아픔이 함께 있다. 우리말은 이것을 함께 고통이라는 말로 나타낸다. 정신적 괴로움과 육체적 아픔은 분명 다름에도 이것 또한 구별이 잘 되지 않는다. 철학도 의학도 어느 것도 이 고통의 정의를 내리지를 못한다.

사람마다 고통의 정도와 질도 다르다. 뜨거움과 차가움과 같은 감각이 어떤 사람에게는 강한 고통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그저 그런 감각의 경험이 되기도 한다. 아무도 고통을 정확하게 정의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고통과 고난은 너무 신비스러워 고통과 고난을 감하는 방법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그 고난의 신비를 파고드는 것이 낫지 않을 까 싶을 때가 있다. 고통을 즐길 수는 없지만 고통의 의미라도 알고 싶은 것이다.



나. 고통과 고난의 신비

1. 우연과 진화론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고통

고통과 고난을 통해서 먼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우연한 진화의 산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진화가 맞다면 고통이 그치도록 진화되는 것이 옳았다고 본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고통이 그친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코티존이라는 부신피질호르몬만 잘 분비되면 통증은 몸에서 사라질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몸은 이것의 분비를 차단한다. 이게 계속 분비된다면 일종의 마약이다. 그런데 오히려 60세 이상 한국 노인의 삼분지 일이 관절의 통증으로 고생하며, 4분지 일은 허리와 신경통으로 고통한다! 사람이 우연히 생겨났다는 진화론으로는 전혀 고통을 설명할 수 없다.


2. 고통을 악하게 이용하게 된 사람들

이렇게 고통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모르나 사람은 고통을 이용하는 방법은 알아냈다. 사람은 범죄한 자들에게 고통을 댓가로 주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죄의 댓가로 이보다 더 좋은 수단은 없다. 그렇지만 고통이 꼭 범죄자들에게만 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세상은 선한 사람들에게 고통이 더욱 많은 경우가 많다. 세상은 불공평한 것이다. 고통을 주는 자보다 고통을 당하는 자가 상처도 받고 고통이 심하다.

고통의 경험을 그릇되게 쓰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어릴 적 작은 고통의 경험을 남에게 전가하는 사람들이다. 연산군, 김정일 같은 사람들이다. 훗날 임금이 된 연산군은 자신을 훈계하기 위해 어린 자신의 종아리를 때렸던 스승 조지서를 처단하였다. 선을 악으로 갚은 것이다! 김정일은 자신의 등극을 반대한 자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최근에는 북한 화폐 개혁을 주도한 사람을 공개 처형하였다. 가장 미성숙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3. 신기한 고통

여기 자발적 고통을 당한 두 분이 있다. 고통의 문제를 잘 알던 두 분이다!

한 분은 석가모니이다. 불교만큼 고통의 문제에 매달린 종교도 없다. 불교에는 108번뇌뿐 아니라 4고, 5고, 7고, 8고, 11고, 16고, 19고, 110고가 있다. 석가모니는 ‘태어나는 것이 고통이요 늙는 것이 고통이요 병나는 것이 고통이요 죽는 것이 고통이다’고 했다.

단순한 고통뿐 아니라 인간이 지니는 모든 부정적인 경험의 해결을 추구한 분이 석가모니였다! 인생 무상, 공허함, 죽음, 괴로움, 슬픔이 도대체 무어냐하는 것이 석가모니의 화두였다! 석가는 그것을 위해 스스로 고통을 택하였다! 일국의 왕자 자리와 처자식까지 등지고 출가하였다. 그런데 결과는 어떠한가?

한 번은 어느 아기 어머니가 석가를 찾아왔다. 그리고 자신의 아기를 좀 살려달라고 호소하였다. 석가는 아무도 죽은 일이 없는 집에 가서 겨자씨 하나를 얻어 오라고 하였다. 사람이 죽은 적이 없던 가정이 있을 리 없다. 그런 집을 찾지 못한 여인에게 석가모니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여! 그게 내가 겨우 찾아내어 네게 줄 수 있는 진통제이다. 슬픔은 그저 나누면 한 사람에게 적게 돌아간단다!”
 
석가모니는 자발적으로 고행을 시작한 출가자였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외쳤던 천재요 수퍼맨이었다! 하지만 그가 겨우 찾았던 수행방법이란 오직 자신을 위한 자발적인 고행 수련법뿐이었다! 법정 승려도 그를 따른 탁월한 수행자였다. 하지만 폐암의 고통을 막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여기 그와 전혀 다른 가장 신비스러운 고통을 당하신 분이 계신다. 바로 예수님이었다! 예수는 고통에 대해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끼신 분이었다. 심지어 죽음과 지옥의 고통까지 아신 분이었다. 그분이 고통을 당하신 것은 석가모니와 차원이 달랐다. 예수는 일부러 고난과 고통의 사람으로 오셨다. 영원히 고통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불쌍한 인간을 위해 스스로
고통을 지시려고 고통 없는 세상을 위해 고통 있는 세상으로 오신 분이었다. 이 파라독스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가 살펴보자.




다. 본문

1. 고통과 고난의 근원 죄(10-12절)

태초에 고통과 고난이 창조 된 것은 아니었다. 그분은 고통과 고난의 근원이 죄 때문이라고 했다. 성경은 곧 고통은 죄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는 바로 그 고통을 대신 지시러 오신 분이었다. 고통 없는 세상을 위해 고통의 세상으로 오신 분이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 했다.

구약 제단의 제물 즉 짐승의 피는 성문 밖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의 그림자였다! 그것은 우리를 의(義)로 삼으시기 위함이었다.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 앞에 고통을 제거 받지 못한다. 죄 값을 치러야만 한다. 사람이 세상에서 범죄하면 육적 사회적 제한을 통해 어느 정도 고통을 감내해야 되는 것과 유사하다.

영어의 고통이라는 단어 pain은 라틴어로 poena(벌)에서 유래한다. 고통은 벌인 것이다! 그리고 그 단어에서 포에니텐티아(poenitentia, 회개)라는 단어가 나왔다. 벌은 당연히 고통스러워야하며 회개는 벌과 관련되어 있다. 세상의 벌은 세상의 처벌로 가능하나 하나님께 지은 벌은 피조물은 갚을 길이 없다. 갚는 방법을 사람이 모른다.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처벌하시고 회개하시기를 바라는지 전혀 모른다. 알아도 그것을 해결할 사람도 없을뿐더러 다른 이를 위해 짐을 질 사람은 더더구나 없다.
 
예수님은 그 처벌을 대신 짊어지시러 오신 분이었다. 짊만 지는 게 아니라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다! 그는 자기가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다(히 3:18)고 하였다.

예수는 학벌(목수)과 지역 차별(나사렛 촌 동네 출신)과 기득권의 견제(산헤드린 공회원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대제사장 등)와 왕따를 모두 당해보신 분이었다! 왕따가 힘든 이유는 억울하기 때문이다. 억울한데다 고통이 함께 오면 참기 힘들어진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다! 이런 억울한 왕따를 당하신 분이었다. 자존심이 상하실 대로 상하신 분이었다. 처절한 수치를 당하였다. 이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알려주려 오셨다!


2. 고통과 고난의 자리로 가라(13절)

그런데 예수는 예수 믿는 우리들도 고난의 자리로 가라 한다(13절).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를 능욕의 자리로 나아가라 한다.

예수는 우리에게도 값진 고난을 요구한다. 십자가 없는 승리는 없는 것이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다. 십자가 신학과 부활 신학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 십자가 신학이 루터 신학이라면 부활 신학은 칼빈적이다. 이 두 가지는 결국 한 점에서 만난다.  십자가 없이 부활 없고 부활 없이 십자가는 없다. 강조점만 다를 뿐 이 두 가지는 함께 강조되어야할 신학의 기초이다.

우리는 어떤 성문 밖으로 갈 것인가. 지금 우리의 고난의 자리는 어디인가! 지금은 오히려 예수 믿고 인정받는 시대이다. 오늘날 예수 믿으면 능욕은 커녕 적당히 대우 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능욕 받을 곳이 없다. 목사는 인기직이 되었으며 어느 새 크고 웅장한 교회 다니는 것이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자랑할 만한 일이 되었다. 요즘 교회의 어린이들이나 젊은이들은 능욕이 무슨 말인지 조차 모를 지경이 되어 버렸다.

예수를 모르는 곳, 예수를 알 되 예수를 잘못 알고 있는 곳으로 가라. 그리고 가서 능욕 받아라! 여기 능욕 받을 한 장소가 있다. 바로 선교의 길이다! 직장, 학교, 사이버 세계, 아프리카, 타 종교권 어디 든 그곳이 될 수 있다. 내가 가든지 내가 가지 못하면 누군가 보내든지 보내고 기도하든지 해야 한다. 예수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 했다. 본문은 예수 십자가의 길처럼 우리도 능욕의 영문 밖으로 나아가라 권면한다.


3. 창조 신앙으로 본 고통과 고난의 신비, 주님의 십자가!(14-15절)

왜 능욕과 고난의 길로 나아가야 하는 것인가? 이 피조 된 세상에는 영원한 성이란 없기 때문이다(14절). 고통 없는 곳이 없다. 세상은 고통과 고난과 외로움의 나그네길이다! 고통 없는 자 누구인가? 대통령, 독재자, 재벌, 과학자, 의사, 교수, 박사, 남녀노소, 빈부귀천 고통 없는 자 누가 있는가!

우리는 이제 본문을 통해 기독교 창조 신학의 신비로운 절정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십자가 신학과 고난의 신학과 약함의 신학이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놀랍게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능욕의 신비가 담겨 있었다. 그 창조의 신비는 약함과 고난과 십자가에 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예수의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담았다. 이 신비는 신앙의 안으로 들어와 보지 못한 사람은 전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영역이다. 세상은 능욕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버리려 하기 때문이다. 능욕의 신비를 모르고는 고통과 고난의 신비를 알 수도, 예수를 알 수도 없다. 그럴 경우 진정한 죽음과 부활도 모르며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그만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라. 나가면서

새로운 새 땅, 새 예루살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영문 밖 십자가 능욕의 길로 나아가신 예수로만 들어갈 수 있다.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라(13절). 그때 우리의 고난과 고통과 수고와 눈물을 주님께서 씻어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곧 오실 영원한 도성,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자(15절).




창조신학연구소
조덕영ki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