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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0-08 19:38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이원론적 계시인식론 비판 2, (임영동 박사)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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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이원론적 계시인식론 비판 2


 2. 교리로서의 계시

  맥그래스가 사용한 ‘교리로서의 계시’라는 말은 명제적 계시라는 말이다. 맥그래스는 역사적으로 교리로서의 계시, 혹은 명제적으로서의 계시를 보수적 복음주의와 가톨릭의 신 스콜라 학파에서 강조해 왔다고 밝힌다. 그리고 복음주의자들은 계시를 매개하는 것을 성경으로 본 반면에, 가톨릭의 신 스콜라주의 사상가들은 전통이나 교회의 교도권(magisterium)의 역할에 큰 비중을 두어왔다고 한다. 맥그래스는 계시가 대체로, ‘계시의 보고’ 또는 ‘진리의 보고’라는 용어로써 명제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맥그래스는 명제적 계시의 전도자이며, 미국 보수주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칼 헨리를 비판한다. 맥그래스는 “칼 헨리의 이론은 계몽적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며, 이 사실에서 그의 이론이 명제적 계시를 강조하고 있는 이유가 설명된다”라고 언급한다. 맥그래스는 칼 헨리가 명제적 계시를 정의할 때,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자들을 통하여 초자연적 방법으로 알려주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지식적 정보”이며, 곧 성경 속에 들어 있다는 것으로 정의한다고 밝힌다. 즉 칼 헨리는 명제적 계시론을 주장한다 할 수 있다.
  맥그래스는 가톨릭 신학자들도 하나님의 명제적 계시를 주장하지만 그들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을 기초로 삼아 성경과 전통이 가르치는 모든 것은 거룩하고 보편적인 신앙적 계시로 믿고 있다고 밝힌다. 즉, 이 명제적 계시는 오직 가르치는 것에 그 권위가 있다고 주장한다. 맥그래스에 따르면, 이러한 이론은 후기 자유주의 신학자인 조지 린드벡(George Lindbeck)에 의하여 비판받았다고 한다. 맥그래스는 린드벡이 이러한 가톨릭의 이론은 “객관적 실재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명제나 진리 주장들”로 비판했다고 한다. 린드벡은 가르치는 권위에 두는 계시가 주지주의적이고 문자주의적이며 객관적 진리를 확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을 거부한다. 즉 완벽하고 시간을 초월하는 형태의 명제로 언급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그릇된 가정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맥그래스에 따르면, 이러한 계시나 교리를 ‘인지적’으로 이해하려는 신 스콜라주의 계시론은 린드벡의 비판을 피할 수 없다고 언급한다. 즉 신 스콜라주의, 특히 헤르만 디크만(Hermann Dieckmann 1880∼1928)의 초자연적 계시는 명제적 계시에 도구가 되어 지식을 전해준다고 말한 것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교리로서의 계시를 택정하는 것도 기독교 역사에서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맥그래스는 칼 헨리와 가톨릭의 명제론적 계시이론과 다른 견해들을 나눌 필요가 없음을 시사한다. 맥그래스는 명제적 계시이든 인격적 계시이든 그리고 가르치는 계시이든 서로 부정하고 어느 한쪽만이 옳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강조한다. 즉 “기독교 신학의 가장 큰 약점이라면 여러 모델이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보완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태도”라고 언급한다. 이는 맥그래스의 생각만은 아니다. 이미 고대 교부들 때부터 이러한 사상은 서로 보완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분파주의자들은 플라톤식의 아우구스티누스와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아퀴나스를 구분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넓게 생각하면 이는 서로 통하고 보완하고 관계 맺을 수 있다.   
  맥그래스는 칼 헨리와 달리, “기독교의 맥락에서 계시는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아는 지식과 관계를 통한 지식 두 가지 모두를 의미한다”라고 주장한다. 즉 계시 개념 자체를 그 두 개념이 상보적이거나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계시에 있어서 명제적 계시라는 의미도 맞는 말이고 인격적인 계시라 해도 맞는 말이라 하겠다.
  칼 헨리는 근본주의를 반대하고 신정통주의는 배격하였는데, 성경 계시관에 있어서 헨리의 주된 논적은 신정통주의로 본다. 왜냐하면 신정통주의는 명제적 계시보다는 인격적 계시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칼 헨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자신 스스로 계시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 안에서 계시한다. 칼 헨리는 하나님이 계시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에 대하여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논리 자체는 바르트의『교회교의학 II/1』신 인식론 서론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 없이는 “교회에서 발언되고 청취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주체 없이 공허한 소리로 허공에 머무를 것이다”라고 밝힌 것과 같다. 이는 하나님 스스로 인간에게 계시하시지 않았다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계시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고 그 선포가 기록됐으며,  또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개념을 취한다. 바르트는 인격적 계시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명제적 계시나 인격적 계시라는 의미보다 계시의 말씀으로 보는 것을 좋아한다. 사실 여기까지는 칼 헨리와 바르트에게 있어서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칼 헨리는 바르트와 달리 성경 안에서 명제적 계시와 인격적 계시를 모두 인정하고 포괄적, 혹은 점진적으로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나지만 결국 종말에 가서 모두 드러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칼 헨리의 명제적 계시의 정의는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이라는 틀 안에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바르트는 성경안에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보기 때문에 칼 헨리와 다르다. 맥그래스는 칼 헨리보다 바르트에 가깝다. 맥그래스 역시 명제적 계시와 인격적 계시를 구분하여 보려하지 않는다.
  스탠리 그랜즈도(Stanley J. Grenz, 1950∼2005) 맥그래스가 본 칼 헨리의 명제적 계시를 인정한다. 그랜즈는 “성경적으로 강조된, 복음적인 명제주의의 옹호자들 가운데 그 누구도 20세기 후반기에 가장 현저한 복음주의 신학자로 불리어진 칼 헨리보다 더 지칠 줄 모르는 불굴의 학자는 없었다”라고 밝힌다. 그랜즈는 명제적 계시가 이미 종교 개혁이래로 신학을 성경을 요약하는 중심적 기능으로 보았다며, “자연계 과학자들이 탐구에 순응하여 밝혀지듯이, 성경의 가르침도 객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하였다”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의 결과로 자연과학이 자연계시의 수많은 사실을 조직화하는 것이듯, 조직신학은 일차적으로 성경의 “사실들”을 조직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를 ‘성구사전식’(concordance) 또는 ‘명제주의적’(propositionalist) 접근방법이라고 부를 것을 언급한다. 이렇게 되면 명제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신학은 곧 성경을 요약한 명제적 계시범주 안에 포함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랜즈는 칼 헨리와 달리 신정통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계시라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명제들이나 정보들을 드러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인간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을 특히나 강조했음을 피력한다. 여기에는 성경 자체나 성경을 요약하는 신학자체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정통주의자들은 명제적 계시와 인격적 계시의 분리를 주장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신정통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명제적 계시와 인격적 계시를 분리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러한 보수주의자들의 견해에 그랜즈는 찬성한다. 왜냐하면 신앙과 객관적인 하나님의 계시는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랜즈는 신학에 대한 성구사전식 이해는 신학의 상황적 성격에 대해 적절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밝히면서, 이는 명제주의자들의 전제와 다르며, 신학이란 본질상 상황적인 학문 분과라고 주장한다. 맥그래스는 그랜즈에게 있어서 명제적 언명에만 한정하는 것을 거부한다고 한다. 즉 “하나님의 본성과 성품을 밝히는 일에서 이야기와 전통이 맡는 역할에 좀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라고 밝힌다.
  에릭슨은 칼 헨리와 달리 명제적 계시와 인격적 계시의 상보적 입장을 드러낸다. 그러나 에릭슨 역시 성경 안에서 보려는 성향으로 볼 때 결과적으로 칼 헨리와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에릭슨 역시 맥그래스와 다르다 할 수 있다. 에릭슨은 신정통주의(neoorthodoxy)자들에게 있어서 계시를 정보(명제적)로 보는 것보다는 인격적 계시로 본다면서, 그들은 하나님은 정보가 아닌 직접 자신을 인격적으로 드러내신다는 것으로 본다고 소개한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에 대해 그 어떤 것도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정통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계시란 명제적인(propositional)것이 아니라, 인격적인(personal)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계시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믿음이란 그 명제들에 대한 지적 동의 그 자체를 믿는다. 하지만 계시가 인격적으로만 주어지는 것이라면 믿음은 인격적인 신뢰나 헌신의 행위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에릭슨은 인격적 계시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한다. 즉 계시를 인격적인 계시로만 이해한다면 신학이란 계시된 일련의 교리들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한 것 중 교회가 발견한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시도한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에릭슨은 어떤 사람을 신뢰하기 위해서 그 사람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정보를 알고 있어야만 한다고 언급한다. 즉, 만일 성경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대한 서술이 없다면, 어떻게 그들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을 알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달리 말하자면, 만일 누군가에게 어떠한 물건을 맡길 때 그 사람의 인격을 믿으려면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한다. 에릭슨은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인격과 신분을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이 기독교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본 연구자가 볼 때, 에릭슨에게 있어서 명제적 계시 없이 인격적 계시는 불가능하다. 즉 그는 성경 안에서의 인격적 계시를 말하고 있다. 에릭슨은 인격적인 계시만을 믿는 사람들도 비록 믿음이 교리적인 명제에 대한 신앙임을 부인하지만, 그런데도 그들 역시 믿음을 정의하거나 교리적 이해를 기술하는데 매우 관심을 기울인다면서 신정통주의 자들을 우호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에릭슨에게 있어서 계시는 명제적, 또는 인격적 계시 중 어느 하나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not either...or) 두 가지 모두를 포용해야 한다(both/and)고 언급하면서 이 둘을 분리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결과로 에릭슨은 하나님의 계시로서 성경을 놓는다. 즉 성경은 명제적 계시와 인격적 계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는 점진적(progressive) 계시라는 말로 이 둘의 관계를 정의한다. 에릭슨은 점진적이라는 개념을 후에 나타난 계시는 앞선 계시를 기반으로 하여 세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고 이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며 서로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언급한다.

예수님이 율법의 가르침들을 확대시키고 내면화시킴으로써 그것들의 수준을 한층 높이신 방법을 주목해보라. 그는 그의 가르침을 시작하면서, “…을 너희가 들었으나…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히브리서 저자는 과거에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셨으니,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라고 말하였다(히 11:1〜3). 하나님의 계시는 구원과 같이 점점 더 완전한 형태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결국 에릭슨은 신정통주의자들과 전통적인 기독교와 계시개념 의미에 대한 합의점을 이끌어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에릭슨은 명제적 계시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성경자체가 명제적 계시이기 때문이다. 즉 인격적 계시를 수용한다 할지라도 결국 에릭슨은 성경 안에서 만의 인격적 계시라 할 수 있다. 에릭슨의 이러한 정의 역시 맥그래스와 같지 않다. 
  맥그래스는 칼 헨리와 위에서 열거한 신학자들과 달리 좀 더 발전된 의미에서 계시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다. 맥그래스는 계시란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격적인 자기 드러냄을 의미한다”라고 정의한다. 맥그래스의 이 말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냄에 예수가 그 절정에 이르고 완성된다 할 수 있다. 맥그래스에 의하면 이러한 정의는 “이미 20세기에 다양한 인격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 예를 들어 프리드리히 고가르텐(Friedrich Gogarten, 1887∼1968)과 임마누엘 히르쉬(Emanuel Hirsch, 1888∼1972),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같은 신학자들이 강조했다”고 한다. 즉 맥그래스는 계시와 관련해 성육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명제적 계시와 인격적 계시 그리고 자연적 계시의 연결로써, 필자가 본 논고 각주 2에서 밝힌바 있는 ‘삼위일체적 자연신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신학용어를 탄생시킨다. 성경 안에서 나타나는 일반 계시가 성경 밖에서 나타나는 일반 계시와 다르거나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맥그래스는 자연신학과 자연과학의 대화를 통해서 성경 안에서 말하는 일반 계시가 성경 밖에서 말하는 일반 계시와 다르지 않음을, 오히려 그동안 명제적으로 가리어지고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 더 드러난다는 관점으로 본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전통적 기독교 신학의 문제점은 맥그래스가 잘 지적한 데로 성경에서 계시되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일반 계시와 연결하지 못하는 데 있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 밖에서는 자연적으로 성경 안에서의 하나님을 신화적으로 또는 종교적 신만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보면, 인격적 계시에는 적지 않은 문제점이 있음을 또한 간과할 수는 없다. 예수를 인격적인 계시로 인식하여 자연스럽게 자연계시와 연결한다면 과정신학으로 나아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인격적 계시에 따라 말하면, 우선 과정신학은 하나님이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설득을 통해서 세상을 이끌어 가신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다. 이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죄악과 재해와 고난에 있어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제1 원인자에서 제외시킨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책임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논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주장하는 성경에 위배되기 때문에 맥그래스의 삼위일체적 자연신학이 그 대안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볼 때, 맥그래스는 칼 헨리가 명제적 계시만으로 주장하는 것에 반대한다 할 수 있으며 성경밖에 있는 일반계시도 하나님의 것으로 여겨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맥그래스는 칼 헨리의 명제적 계시모델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계시인식에 대한 정의와 비교 논증하고 있다. 맥그래스는 명제적 계시이든 인격적 계시이든 그리고 가르치는 계시이든 모두 하나님의 계시로 인식하길 원한다. 성경 문자주의자들 입장에서 볼 때, 맥그래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성경 문자주의자들은 오직 성경 외에 다른 어떤 사상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맥그래스의 이러한 견해에 크게 동조한다. 왜냐하면 성경 역시 인간의 언어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도 성경 밖에 있는 인간의 역사와 연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음은 명제적 계시 모델과 달리 인격적 계시의 입장에서 강하게 주장되고 있는 ‘하나님의 현존으로서의 계시 모델’ 즉 부르너의 계시관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계속>

필자 임영동 목사는

샬롬교회 담임이며 백석대에서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과학적 신학과 삼위일체적 자연신학>으로 조직신학 학위(M. Div., Th. M., Th. D.)를 취득한 알리스터 맥그래스 전문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