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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4-05 17:00
나의 아담: 아담의 역사성에 대한 논쟁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1,408  

영역: 성경/신학

키워드: 역사적 아담, 진화적 창조론, 원형적 창조론

 

 

나의 아담: 아담의 역사성에 대한 논쟁

My Adam: Debates on Historical Adam

 

 

변희지

Heejee BYUN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Vancouver Institute for Evangelical Worldview,

ACTS Seminaries of Trinity Western University

7600 Glover Rd., Langley, BC V2Y1Y1, CANADA

EMail: benybenyg@gmail.com

 

 

(Received on April 21, 2016

Revised and accepted on June 15, 2016)

 

 

This essay presents 4 views on the historical Adam, shown in <Four Views on the Historical Adam>: Evolutionary Creation, Archetypal Creation, Old Earth Creation and Young Earth Creation. At the end of the essay, the author presents her own mode which is put in between evolutionary and archetypal Creation.

 

 

I. 아담을 보는 네 가지 관점

1. 진화적 창조론

 2. 원형적 창조론

3. 오래된 지구 창조론

4. 젊은 지구 창조론

II. 나의 아담

1. 관점들의 요약

 2. 나의 아담

III. 나오며

참고문헌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책임 연구원이었던 프랜시스 콜린스(Francis Collins)는 2006년, <신의 언어>라는 책을 통해 아담의 역사성 논쟁을 촉발시켰다. 그는 아담과 하와가 역사 속에 실존한 인류의 조상이라고 보기에는 유전학적으로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는 현재 인류의 유전자적 다양성으로 볼 때, “현재의 인류는 약 10만년 전에 적어도 1만 명 이상의 사람들로부터 왔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아담은 역사 속에 실존했던 한 인물이 아닌가? 이 연구는 그러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 연구는 매튜 배릿과 아델 B. 케인데이가 편집한 <아담의 역사성 논쟁>(김광남 역, 새물결플러스, 2015)을 따라 진행된다. 이 책에서 아담의 역사성과 관련해 서로 다른 4개의 관점을 소개한다. 그리고 각 관점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견해를 제시하고 나머지 세 사람들이 이에 대해 평가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이 연구는 전체적으로 이 책의 내용과 흐름을 따라 전개되는 글임을 밝힌다. 데니스 라무뤼의 진화적 창조론, 존 왈튼의 원형적 창조론, 존 콜린스의 오래된지구 창조론, 윌리엄 배릭의 젊은지구 창조론의 내용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간단한 평가를 내린 후 마지막에 필자의 결론으로 마무리할 것이다.

 

 

I. 아담을 보는 네 가지 관점

 

1. 진화적 창조론(Evolutionary Creation)

진화적 창조론(Evolutionary Creation)은 진화를 하나님의 창조의 방법으로 수용한다. 흔히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 모델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창조하신지에 대해 알려주지 않는 가운데, 현대 과학의 증거들은 진화론을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에 진화를 통한 하나님의 창조를 주장하는 입장이다. 스스로를 진화적 창조론자로 보는 데니스 라무뤼(Denis O. Lamoureux)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진화적 창조론자들은 창조주가 목적론적 진화(teleological evolution)의 체제를 포함해 자연 법칙들을 정하셨고 지금도 그것을 유지하고 계신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생명의 진화는 목적이 이끄는 자연 과정이다. 진화적 창조론은 인간이 인류 이전의 조상들(pre-human ancestors)로부터 유래했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인류의 죄가 드러난 것은 신비라고 주장한다.”

 

즉 진화적 창조론은, 진화론에서 말하는 생명의 기원과 인류로의 진화 과정이 창조주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진화라는 과학적 사실과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를 조화시키고자 한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자연의 질서를 만드시고 그러한 질서와 법칙을 통해, 다시 말해 과학의 원리를 통해 일하셨고 지금도 그렇게 일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예컨대 엄마의 뱃속에 태아가 수태되고 자라서 태어나는 일련의 과정들은 발생학적 성장이라는 자연과정의 메커니즘을 통해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사람을 흙으로 창조했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진화적 창조론자들이 보기에 그것은 성경의 1차 독자인 고대 이스라엘의 세계관에 맞추어(accommodation)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계시된 결과라는 것이다. 예컨대, 성경에서 해가 뜨고 진다거나 운행한다고 말하는 부분들(전1:5, 시19:6)은 고대인이 가지고 있던 우주관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물리적 사실(현대 과학에 의해 밝혀진 바와 같이)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창세기 2장 7절의 사람의 창조 역시 고대 근동 사람들의 기원관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것은 물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화적 창조론에 의하면, 흙으로 사람을 만드는 인간의 창조는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라무뤼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아담의 존재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기원에 관한 고대인의 개념, 즉 신규 창조라는 개념에 근거한다. 전문 용어로 말하자면, 아담은 고대분류학의 역투사적 결론이다. 그리고 고대 과학은 물리적 실재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담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진화적 창조론의 이와 같은 주장은, 그리스도를 나를 대속하신 구주로 고백하는 헌신된 복음주의자라 하더라도 아담의 역사성에 있어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성경과 자연(또는 과학)이라는 두 권의 책을 ‘비과학적 일치주의(non-scientific concordist)’라는 관계로 조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라무뤼가 사실로 전제한 진화는 정말 과학적 사실인가? 성경적 관점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과학적 관점에서만 얘기한다고 해도, 진화를 역사적 사실로 보기에는 적어도 아직은 시기상조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화석이나 지질학적 증거들은 대체로 결정적이지 않다. 따라서 그것이 진화를 뒷받침하는지, 혹은 창조나 지적설계 등 다른 기원관을 뒷받침하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자의 해석을 필요로 한다. 진화를 사실로 믿는 연구자들에게는 진화론적 증거로 보이기 마련이다.

 

또한 진화적 창조론은(적어도 라무뤼의 경우에는) ‘인간이 인류 이전의 조상들로부터 유래했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인류의 죄가 드러나는 것은 신비’라고 말한다. 진화적 창조론자들의 주장과 같이, 역사적 존재로 아담이 실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는지, 그리고 실존하지 않았던 아담이 어떻게 타락하여 그 죄가 인류 전체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것을 단지 ‘신비’에 붙이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또한 그의 원칙, 즉 ‘성경에 나타나는 과학은 일종의 부수적 요소로서 고대인들의 과학관에 맞추신 것이므로 현재의 물리적 실재와 같지 않다.’는 원칙은 명쾌하고 설득력이 있다. 무엇보다 성육신하신 사랑과 겸손의 하나님의 인격적 특성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적용에 있어 보다 세밀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적용하는 과정에서, 성경의 모든 난제들을 이 하나의 큰 원칙으로 해석하려는 단순한 환원주의적 적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 원형적 창조론(Archetypal Creation)

원형적 창조론은 기본적으로 창조론이지만,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음으로서 열려 있는 입장을 취한다. 원형적 창조론을 주장하는 위튼대학의 왈튼(John H. Walton)은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인간의 물질적 기원이 아니라 기능적 기원을 다룬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그는 “아담과 하와는 역사적 인물이며 실제 과거에 살았던 인물들이다. 그럼에도 나는 성경 텍스트가 그들이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원형적 인물들(archetypal figures)이라는 점에 더 많은 관심을 둔다고 확신한다.”

 

왈튼은 아담의 기원과 관련하여 전통적으로 한 묶음으로 제기되는 세 가지 질문들을 분리시킴으로서 자기의 입장을 명료하게 한다.

 

아담과 하와는 실제 과거에 살았던 실제 인물인가?

아담과 하와는 최초의 인간이자 모든 이의 조상인가?

아담과 다른 종들 사이에는 물질적인 불연속성이 존재하는가?

 

그는 아담과 하와가 실제 과거에 살았던 실제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두 번째와 세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창조기사를 적절하고 주도면밀하게 읽는다면 적어도 우리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질문에 대한 과학의 주장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성경의 주장에서 분리될 수 있음을 허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그것을 선호하기까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오직 첫 번째 질문만 갖고도 아담 안에 있는 죄와 죽음의 기원을 적절하게 지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질문에 대해 부정적으로 답한 이들이 성경이나 신앙을 거부했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정리하면, 왈튼은 아담의 역사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아담이 최초의 유일한 인간이라거나 모든 인류의 조상이라고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아닐 수 있다고 말한다. 혹은 다른 종들과 아담 사이에 물질적인 불연속성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도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한다. 즉 그는 생물의 진화에 의한 인류의 출현, 다시 말해 아담이 진화에 의해 나타났을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열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첫 번째 질문에 대한 긍정을 통해, 복음주의 신학의 죄와 죽음의 기원을 충분히 설명해 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그것을 더 ‘선호하기까지 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왈튼의 원형적 창조론은 진화적 창조론과 일반창조론(오래된 지구창조론과 젊은 지구창조론을 하나로 묶는다면)의 중간에 있는 견해라 할 수 있다.

 

왈튼은 아담을 역사 속에 실존했던 개인들이라고 주장하지만, 성경 텍스트에서 그들은 인류를 대표하는 일종의 원형으로 묘사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특히 창세기 2장의 창조 기사(왈튼의 표현으로는 ‘지음’(making)’에 관한 이야기들)은 아담과 하와의 원형적 역할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 인간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원형(archetype)이란 기본형(prototype)과 대조되는 바, “기본형인 아담은 “원시인(Primeval Man)”을 의미하는 반면 원형인 아담은 모두를 대표하면서 모든 사람(Everyman)”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아담은 모든 사람을 의미하며, 모든 사람을 대표하여 그 역할, 기능을 수행하는 기능적 원형이 된다.

 

왈튼은 창세기를 주해하면서, 창세기 2장에 등장하는 아담이 ‘흙으로 지음 받았다’고 기록된 것은 그가 ‘죽을 운명을 지닌 존재로서의 원형’으로 묘사되는 것이지 ‘인간의 물질적 기원이 흙과 관련있다’는 기원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고 보았다. 또한 여호와께서 아담을 ‘이끌어 동산에 두셨다’는 것은 아담이 “인간 실존의 일상 영역에서 이끌려 복되게도 특별하게 준비된 장소로 옮겨졌다고 주장”하면서 이는 ‘축복과 선택된 자’의 원형으로서 아담을 묘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을 확증하는 것은 창세기 2장 15절에 사용된 히브리어 ‘아바드’와 ‘샤마르’(‘아바드’와 ‘샤마르’에서 파생된 부정사)의 용례를 볼 때, 여기서의 아담은 성소를 돌보는 제사장적 역할의 원형으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왈튼은 이러한 역할 및 기능적 대표로서의 인물묘사는(신이든 인간이든) 고대 근동 문헌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인물 인식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성경과 고대근동 문헌들은 인간의 물리적 기원에는 관심이 없다. 양자는 공히 인물의 ‘역할’에 주목한다.

 

또한 창세기 1-3장의 두 가지 창조이야기(첫째는:1-2:3, 둘째는 2:4-3:24)를 ‘톨레도트(toledoth)의 변화라는 문학적 분석의 결과, 왈톤은 “아담과 하와를 반드시 첫 번째 사람으로 간주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짓는다. 이것은 첫 번째 창조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이 반드시 아담일 필요는 없다는 주장과 아담과 하와가 ‘더 큰 집단의 일부’였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창세기는 아담의 최초성과 유일성을 반드시 보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왈튼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따라서 만약 창세기가 아담과 하와가 최초의 유일한 인간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인간의 물질적 기원에 관해 설명하지 않는다면, 아담과 하와의 유전적 역할이나 인간의 물질적 기원에 관한 성경의 주장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만약 성경이 그런 주장을 하지 않는다면, 성경은 과학이 제공하는 어떤 견해(예컨대 진화론 모델이나 인구 유전학 같은 것들)와도 – 과학이 하나님을 무대에서 배제하지 않는 한 – 대립하지 않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왈튼은 기원에 관해 제기되는 세 가지 질문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를 분리시킴으로서 아담의 역사성과 신학적 의미를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현대 과학의 증거들과의 불일치를 해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왈튼의 논증은 성경과 고대근동 문헌 텍스트들을 면밀히 분석함으로서 아담의 원형성을 강조하는 독특한 모델을 구안했다는 점에서 독창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라무뤼의 비판대로 “이러한 접근 방식은 현대 과학과 기독교 신앙의 고질적 갈등을 슬며시 피해 간다는 이점이 있다.” 즉, 필자가 전술한 ‘아담의 역사성과 신학적 의미를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현대 과학의 증거들과의 불일치를 해소하고 있다’는 진술은 사실상 그 ‘불일치를 피해가고 있다’고 바꾸어 쓸 수 있는 것이다. 왈튼에 따르면 성경이 침묵하고 있고 관심을 두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은 것이다.

 

그럼에도 왈튼의 신학적 질문과 과학적 질문을 나누는 이러한 세심함은 아담의 역사성 논쟁에 나타나는 논점을 정확히 짚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성실한 주해 작업을 통해 이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직 성경으로’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 온다.

 

3. 오래된 지구 창조론(Old Earth Creation)

기본적으로 오래된 지구 창조론자들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 모든 생물들을 각기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음을 신뢰하지만, 창세기의 6일 창조와 족보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창조 기사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연대를 계산할 경우 지구 연대는 약 6,000년 정도라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 과학에 의해 이제는 사실로 확인된 지구연대 약 45억년, 우주연대 약 138억년이라는 분명한 결론과 명백히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상 젊은 지구 창조론에 대한 문제제기로서의 오래된 지구 창조론은 현대 과학의 분명한 성과를(특히 우주 및 지구 연대와 관련하여, 인구 유전학적 연구 및 대진화는 이들에게 분명한 성과로 인정되지 않는다.) 성경이 말해주고 있지 않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방법으로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창조기사의 많은 부분들을 그 방법이 어떠하건 간에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오래된 지구 창조론은 역사적 아담을 실존한 개인으로 본다. 즉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에 의해 신규 창조된 최초의 개인이며(친족집단일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지만) 나아가 이 한 쌍의 부부가 온 인류의 조상이라고 간주한다. 이 견해는 진화와 인구 유전학적 연구에 열려 있는 왈튼의 원형적 창조론과 오래된 지구연대라는 분명한 현대 물리학적 결과에 조차 닫힌 태도를 취하는 젊은 지구 창조론의 중간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오래된 지구 창조론을 주장하는 콜린스에 따르면, 창조 기사는 성경 전체 또는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의 커다란 스토리라인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한다. 성경의 스토리라인의 배후에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기본적인 가정의 역할을 하며, 그것은 성경의 여러 핵심 주장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창조 기사를 비롯한 성경의 스토리라인은 참되며, 그 참됨은 예수그리스도와 계시록에서의 요한이 본 환상들, 바울의 논증 등을 통해 입증된다. 콜린스는 그 참된 스토리라인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예상된다고 말한다.

 

(1) 사실상 인류는 한 쌍의 부부에서 유래된 한 가족이다.

(2) 하나님은 우리의 제일 첫 조상들을 지으시기 위해 특별하게(“초자연적으로”) 행동하셨다.

(3) 역사의 시초에 우리의 최초 조상들은 인간의 삶 속으로 죄와 역기능을 들여왔다.

 

그러면서 콜린스는 “성경을 믿는 이들은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이런 예상들의 토대가 되는 참되고 적절한 내러티브로 간주해왔다.”고 말한다. 콜린스는 물론 오늘날 과학의 발전들이 다른 그림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진화론과 같은 그림들은 인간의 고유함과 독특함을 설명해 낼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인간과 유전학적으로 중요한 부분을 공유한다고 주장되는 침팬지와 질적으로 다른데, 콜린스의 표현을 따른다면 그것은 “단순히 단계의 차이가 아니라 종류의 차이다.” 인간의 언어사용과 예술, 그리고 정의로운 공동체를 갈망하는 현상들이 이를 입증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여 인간의 이같은 고유성을 ‘하나님의 형상’과 연결짓는다.

 

콜린스는 성경에 대한 지나친 문자주의적 접근 대신에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가 “자유와 한계”라 이름붙인 접근을 제안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서 헌신과 관련된 위계를 인식할 수 있다. 즉 목숨 걸고 수호해야 할 근본적이고 중핵적인 것이 있는가 하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대체로 부차적인 요소들도 있다. 이런 보다 ‘순전한’ 기독교의 교리들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면서 자유를 누리고 한계를 설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콜린스에게 창세기 1-11장은 엄격한 문자적 해석이 아니라, 바로 그런 자유의 향유와 한계의 설정이라는 접근이 필요한 부분이다.

‘자유와 한계’의 접근에 따라 창세기1-11장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인류의 기원은 단순한 자연 과정을 넘어선다.

2, 아담과 하와는 인류의 시초에 존재했다. 이것은 인류 공통 경험에 대한 고찰에서 온다.

3. “타락”은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든지 역사적인 동시에 도덕적이다. 또한 그것은 인류의 시초에 발생했다. 상실에 대한 우리의 보편적인 인식은 이 사건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런 보편성이 어디에서 올 수 있단 말인가?

4. 만약 누군가가 사실은 인류의 시초에 아담과 하와 외에도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확신을 계속해서 유지하려 한다면, 그는 그 사람들을 친족 관계로 연결된 하나의 부족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 경우 아담은 다른 구성원들보다 먼저 태어난 그 부족의 족장이고, 하와는 그의 아내일 것이다. 이 부족이 아담과 하와의 인도 하에 “타락했다.” 이 원리는 대표자를 통한 연대라는 개념에서 나온다.

콜린스가 대표한 오래된 지구 창조론은 젊은 지구 창조론이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서 현대 과학의 성과들에 대해 폐쇄적 태도를 가지는 문제를 보완해 준다. 콜린스의 성경이 보여주는 큰 이야기에 근거한 분석은 복음주의자들에게 친숙함과 편안함을 준다. 그의 논증은 그 이야기를 믿는(혹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실존과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의 논증은 성경(그의 표현대로라면 성경이 보여주는 스토리라인) 내부에 머물고 있다. 물론 복음주의자들에게 성경은 진실하고 참되다. 그러나 아담의 역사성에 대한 논쟁은 대체로 인간의 기원 문제를 과학의 영역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의 문제이다. 따라서 성경(의 스토리라인) 내부의 증거들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라무뤼는 콜린스에 대해 “나는 이 ‘세상과 관련된 큰 이야기’를 전혀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것이 역사적 아담을 필요로 하는가? 나의 답은 “아니요.”다 라고 말한 것이다. 성경의 큰 이야기로서의 의의가 어째서 아담의 실존성을 필연적으로 입증하는지 콜린스는 말해주지 않는다.

 

4. 젊은 지구 창조론(Young Earth Creation)

젊은 지구 창조론이라는 이름은 이들이 창세기 본문을 그대로 받아들여, 하나님의 창조가 연속된 6일(하루가 24시간) 동안 일어났으며, 아담은 실제로 흙으로 만들어졌고, 창세기에 기록된 족보를 따라 계산했을 때 지구는 약 6000년 내외의 짧은 연대를 갖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창조과학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젊은 지구 창조론을 지지하는 배릭(William D. Barrick)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내 관점에서 아담은 온 인류의 기원이 되는 최초의 인간이다. 아담의 역사성은 수많은 성경의 교리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며 성경의 영감 및 무오설과 상관이 있다. 아담에 대한 전통적 견해는 진화론을 수용하려는 태도를 거부하는 대신, 성령께서 창세기 저자를 감독하시어 그에게 6일간의 연속된 기간 즉 문자적인 6일 동안 일어난 하나님의 창조 활동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게 하셨다고 주장한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원형이나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한 명의 개별자인 아담을 보여주며, 신약성경의 여러 본문은 아담의 역사성에 의존하고 있다.”

 

배릭은 기본적으로 성경은 무오한 것으로 성경에 드러나는 진술은 역사적이고 실제적이라고 전제한다. 그는 “화자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역사적 확증 없이도 그 이야기의 진실성을 보증하기에 충분하다”는 월키(Bruce K. Waltke)를 인용한다. 배릭은 “창세기 이야기가 내러티브 동사 형태, 시간과 공간의 자리매김을 통한 본질적으로 일관성 있고 연대기 순으로 연속되는 사건들을 제시”한다는 월키의 주장에 동의한다.

 

배릭은 아담의 한 개인으로서의 유일성도 논증한다. 창세기 1-2장에 나타나는 “아담(adam)”이라는 단어는 관사 사용 여부와 관계 없이 “최초의 톨레도트가 반복적으로 그 사람을 한 사람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2:18a)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는 혼자다. 계속해서 그는 “이어지는 본문들(창2:24,25; 3:1,4,6,7)에서 나타나는 한 명의 남자(아담)와 그의 유일한 아내(하와)에 대한 언급은, 성경 저자가 그의 독자들에게 그 두 사람이 인류의 조상이며 그들이 자식을 낳기 전까지는(4:1-2) 그와 같은 다른 어떤 이들도 존재하지 않았음을 이해시키려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배릭은 창세기와 나머지 구약성경들, 그리고 신약성경을 통해 아담의 역사성과 유일성, 개인성을 예증한다.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에게 아담의 역사성과 개인성은 매우 중요하다. 배릭은 “만약 첫 번째 아담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두 번째 아담인 예수가 첫 번째 아담이 지은 죄와 그로 인해 나타난 결과 역시 해소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에게 아담의 역사성은 “복음의 문제”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담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토대를 파괴한다.”고 본다.

 

배릭은 아담이나 창조 기사에 대한 다른 견해들은, 생명의 기원을 진화로 설명하는 진화론이나 고대근동의 다른 문헌들을 성경의 증거보다 더욱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이는 배릭을 대표로 하는 젊은 지구 창조론이 현대과학과 고고학의 성과에 대해 가장 닫힌 자세를 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4가지 관점, 아담의 역사성 논쟁의 스펙트럼에서 젊은 지구 창조론은 진화적 창조이론의 가장 반대 극단에 위치한다.

 

그러나 문제는, 젊은 지구 창조론이 분명하게 물리적 사실로 드러난 과학적 성과나 신뢰할 만한 고고학적 발견에도 눈과 귀를 닫아버림으로써 21세기의 프톨레마이오스를 자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문자적 6일 창조의 기원은 제7일 안식교 교주였던 엘렌 화이트(Ellen G. White)로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양승훈(2014)에서는 한국 창조과학의 비과학성과 전투성을 안식교와 연결지어 논하고 있다. 배릭을 비롯한 모든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에게 섣불리 적용한는 것은 위험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믿음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은 항상 편협함과 과격과 폭력과 함께 온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비단 창조과학의 배타성과 편협성은 비단 한국의 창조과학운동에만 해당하는 문제라 볼 수 없을 것이다.

 

 

II. 나의 아담

 

1. 관점들의 요약

지금까지 <아담의 역사성 논쟁>을 중심으로 아담의 역사성에 관한 진화적 창조론, 원형적 창조론, 오래된 지구 창조론,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의 견해를 살펴보았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비문자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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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지구 창조론



<v:line style="position: absolute; v-text-anchor: top; mso-position-vertical-relative: line; mso-position-vertical: absolute; mso-position-horizontal-relative: margin; mso-position-horizontal: center;" id="_x182479856" to="344.70pt, 8.46pt" strokeweight="0.50pt" strokecolor="#5b9bd5" from="0.00pt, 14.66pt"></v:line> • 진화적 창조론 • 원형적 창조론

열림 닫힘

 

• 젊은지구창조론

 

문자적

 

표1. 4개 모델의 지위

 

표1은 아담의 역사성 논쟁에서 다룬 4가지 모델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가로축은 성경과 신학 외적 증거 즉, 생물학, 유전학, 고고학(고대 근동학)의 연구 성과를 대하는 태도를 열림과 닫힘으로 나타냈다. 세로축은 성경 해석에 있어 문자적 접근의 정도를 나타낸 것이다.

 

진화적 창조론은 현대과학의 성과들에 가장 열린 태도를, 젊은 지구창조론처럼 철저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문자적인(본문을 면밀히 주해한다는 점에서) 접근을 하고 있다.

 

원형적 창조론은 과학적 성과에 대해서 아담의 역사성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열린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역시 성경 본문의 면밀한 주해라는 측면에서는 문자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관찰의 결과를 원형적으로 해석한다는 점에서는 비문자적 해석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래된 지구창조론은 지구연대에 있어 현대 물리학의 성과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면서 성경본문에 대한 문자적 접근을 지양하여 비문자적인 테마나 모티브, 내러티브 중심의 접근을 보여준다.

 

젊은지구창조론은 현대 과학의 성과를 전혀 반영하지 않으며 문자 그대로의 역사성을 주장하는 점에서 극단적인 문자주의를 보여준다.

 

4개 모델이 아담의 역사성을 보는 관점을 정리하면 표-2와 같다.

 

표-2. 4개 모델의 아담의 역사성에 대한 관점





 


진화수용

여부
 

아담의

역사성
 

아담의

개인성
 

아담의

최초성
 

아담의

유일성
 

온인류의 조상
 



진화적 창조론
 

O
 

X
 

X
 

X
 

X
 

X
 



원형적 창조론
 


 

O
 

인간대표로서

O
 

X
 

X
 

X
 



오래된 지구창조론
 

X
 

O
 


 

O
 

O
 

O
 



젊은 지구창조론
 

X
 

O
 

O
 

O
 

O
 

O
 


 

O: 인정/수용 ◁: 배제하지 않음 X: 인정하지 않음.

 

 

2. 나의 아담

이 연구를 시작하면서 나는 아담의 역사성과 개인성을 부정하는 견해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젊은 지구창조론에서 주장하는 아담과 함께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 왔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내가 모태신앙으로서 어머니 태에서부터 그려왔던 ‘아담’이란 사람의 그림이 머릿속에 있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담이라는 모델 없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신앙이란 하나님과 인격을 나누는 것인데, 인격 없는 유전자 풀이나 집단으로 어떻게 하나님과 인격을 나눌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런 나의 신앙적 배경이나 신앙의 정서와는 별개로, 연구하는 동안 나의 이성은 진화적 창조론이나 원형적 창조론의 논증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신앙인은 그의 지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므로, 현대 과학의 성과들을 하나님의 또 하나의 책으로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왈튼의 면밀한 창세기 주해를 통한 원형적 아담에 대한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아담의 역사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현대 과학의 성취들에 대해 열린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에서 그려지는 아담은 문학사에서 근대 이전에 보여주었던 인물 특성들과 유사한 면이 있다. 일반적으로 근대 문학이라고 할 때, 등장하는 인물의 개인성이 중요한 척도로 기능한다. 예를 들어, 고전소설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은 “유능한 서자”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기능한다. 거기에 홍길동이라는 사람의 개인적 성격(Personality)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 인물들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유능한 서자”라는 개념에 근거하여 그려지며 그에 반하는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반면, 현대소설에서 인물은 그 사람의 개인적 특성들을 드러냄으로서 실제적인 개인의 모습에 더욱 가깝게 그려지는 것이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혜린이 때로는 선하고 때로는 악하기도 했다가 강인한 모습과 연약한 모습을 함께 보여주고 울고 웃고 사랑하는 입체적인 인간으로 그려지는 것처럼.

 

그런 면에서 성경의 아담은 입체적 개인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왈튼의 말처럼 아담은 인간을 대표하며 하나님의 선택받은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보여주는 원형적 인물로 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이는 다윗의 캐릭터와 비교할 때 더욱 도드라진다. 다윗은 그가 훨씬 후대의 인물로서 왕이었므로 그와 그와 관련된 더 많은 자료들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웃고, 울고 ‘내 마음에 합한 자’라 칭찬받기도 하다가 가장 찌질한 왕의 모습으로 심판받기도 한다. 그에 비해 아담은 개성을 가진 개인이라기 보다는 원형적 인물이며, 따라서 창세기나 고대근동 문헌들의 인물 인식은 이처럼 인물의 역할이나 기능에 주목한다는 왈튼의 주장은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가 말했듯이, “우리는 오직 첫 번째 질문만 갖고도 아담 안에 있는 죄와 죽음의 기원을 적절하게 지지할 수 있”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의 입장을 수용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III. 나오며

역사적 아담은 존재했는가? 나의 결론은 ‘역사적 아담은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왈튼의 견해를 따라 창세기는 인간의 물질적 기원보다는 원형적 기원을 그리고 있으며, 아담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원형적 인간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아담의 역사성은 중요한 문제인가? 그렇다. 그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창세기의 아담과 달리 오늘 내가 만난 하나님은 나를 인격적으로 만나주셨다. 그분과 나는 원형으로서가 아니라 인격과 인격으로 만나서 사랑을 나눈다. 실존했던 아담 역시 그랬을 것이라 믿는다. 창세기에서 그가 원형적으로 그려지는 이유는 고대인들의 인식에 맞추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성경의 집필 목적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와 관계를 나누시기 위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추론을 넘어서 계신다.

 

 

참고문헌

 

매튜 배릿, 아델 B. 케인데이 편. 김광필 역. <아담의 역사성 논쟁>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5).

양승훈, ‘창조과학의 유사과학적 뿌리’. <창조론오픈포럼> 8(2014): 48-62.

양승훈, <창조와 진화> (서울: SFC출판부,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