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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3-15 22:55
기독교 세계사관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715  
기독교 세계사관(한철하 박사, 전 ACTS 총장)




Ⅰ. 여러 가지 세계사관
(1). 세계사관 
  세계사는“사관”(historiography)즉 “역사철학”에 따라서 달리 볼 수 있습니다. Hegel의 세계정신 (der Welt Geist)사관 Marx의 유물사관 등이 좋은 예입니다. 그러나 그 잘못된 역사관 때문에 Nazi독일 공산주의 등으로 인해 인류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Augustine의 "신국론“(the City of God)은 세계사를 세상나라 속에서 순례하는 “신국”의 역사로 보는 기독교 역사관의 대표입니다.  “세상나라”의 원리는  자애 (amor sui)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는 “하나님의 사랑”(amor Dei)으로서 「신국론」의 핵심입니다.

(2). 신약의 세계사관
  「성경」은 세계사관의 책입니다. 먼저「신약」의 세계사관들을 예거 하겠습니다.

  로마서 9장-11장은 사도 바울의 세계사관 입니다.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함으로”(11:30) “가지 얼마가 꺽여졌고“ ”돌감람 나무인 이방인이 참감람 나무에 접부침이 된 것“(11:17)으로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심은 ”이방인이 받은 궁휼을 이스라엘에게도 베풀기 위함“(11:31) 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모른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궁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11:32)로 결론  내립니다 이어서 사도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고후 10:4-6은 또 하나의 ”세계사관“의 한 편이라 하겠습니다. 바울의 싸우는 병기는 “육에 속한 것” 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의 싸움은 “모든 이론을 파하여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순종케 하는 일” (10:5) 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세게사의 의미는 “신자들의 순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순종치 않은 것을 벌 하려고 예비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10:6). 즉 최후 심판을 준비하고 있는 셈입니다.
  마28:16 -20에서 예수께서는 모든 신자가 선교사관을 가질 것을 촉구 하십니다. 부활 하신 예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권세“를 받으셨습니다. 이제 땅 끝까지 선교할 것을 명하십니다.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실“것을 약속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세계사의 의미는 복음선교에 있습니다.

(3). 구약의 세계사관
  구약은 세계사관으로 가득 합니다. 모든 에언의 말씀이 다 세계사의 나갈 방향을 제시 합니다. 본래 구약과 신약의 관계는 예언과 성취의 관계입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구약」의 모든 예언을 다 성취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언약(covenant)이
하늘에서 성취 될 것을 피로서 새로히 약속을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부라함과 세우신 언약은 “모든 족속이 아부라함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누리게 할(창;12)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오심으로 성취 되었습니다. 그러나 ”언약“ 에 따라 이 일은 하늘 나라에서 성취될 것입니다. Augustine의 말 대로 “제 7일에 우리는 ”쉬면서 보며 보면서 사랑하며 사랑하면서 찬송할것”을 말합니다. (「신국론」끝 내는말)

  “거룩한역사” (sacra historia)즉 「성경」의 역사는 어느부분도 은혜롭지 않은 부분이 없습니다. 큰 줄거리는 「구약」은 모세의 율법 즉 “십계명”에
대한“축복”과 “위협”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메시아 예언이 「구약」전체를 일관합니다. 예수께서 오심으로 「구약」의 메시아 예언은 성취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은 메시아 오신 기뿐소식을 중심으로 합니다. 눅 24에서 예수께서 “복음”의 참뜻을 알려 주심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할로 죄사함을 얻게하는 회계” 입니다. 예수께서는 복음을 예루살램으로 시작하여 땅끝까지 이를것을 예언 하십니다. 즉 “교회사”의 의미는 “선교”에 있음을 말하신 것입니다.

2. “기독교서양”은 기독교 “세계사관”의 계기

  “기독교서양”은 “세계사”를 기독교 세계사관“의 입장에서 보며 그 방향을
잡는 계기가 됨니다. 이「책」에서 우리는 1500년의 역사를가진 “기독교서양”의 참상과 몰락을 대단히 아쉬워 했습니다 (14 )기독교서양은 4 세기초 콘스탄틴 황제의 Milan의 “직령”(勅令)(A.D. 314)으로 부터 시작하여
  18세기 Wesley(A.D.1791)때 까지 1.500년동안 뚜렷이 기독교적
성격을 견지 하여 왔습니다.그러나 19세기를 앞두고 Kant는 계몽사조(The Enlightenment,) 운동의 일환으로 “신앙”으로가 아니며 “이성”의 한계 안에서 기독교 종교를 세우는 운동 을 전개 하였습니다.서양교회는 19세기 시작에 Wesley의 “신앙” 노선을 버리고 Kant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 의 노선을 선택하여 왔습니다. (13.29.117.136.). 그 결과는 “기독교서양”의 만행과 참상이었습니다.(20.21.136.) “기독교서양”은 19세기 동안에 온 세계를 향하여 식민지 착취 아편전쟁 노예무역을 일 삼았습니다. 그 결과로 20세기에는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을 벌렸고, 공산 자본의세계 양분화와 냉전의 비극을 연출 했습니다. 한마디로 “기독교서양”은 19세기 20세기동안 기독교적 성격을 완전히 버렸습니다. “기독교서양”은 19세기의 만행과 20세기의 참상에도 불구하고 외형상으로는 1970년대까지는 기독교적 외형을 유지하여 왔습니다. 기독교인구는 98%를 유지 하여여 왔고 동유럽에서도 96%를 유지 하여 왔습니다. 그 외형상의 “기독교서양”의 모습도 80년대에 이르러서는 기독교 인구의 통계마져 무너져 왔읍니다. “기독교서양”의 이와같은 참상과 몰락에 대해서 세계교회와 신학자는 마땅히 “유감”의뜻을 같이 해야한다는 것이 이「책」의 주장입니다.

3, 기독교 세계사관 운동의 오늘의방향

  “기독교서양”은 그 영광과 몰락과 참상에도 불구하고 “세계사의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서양의 오늘의 의미는
  ① “기독교서양”은 세계사를 기독교사로 만든 본 보기를 보였습니다.
이것이 오늘에도 세계사의 의미와 방향을 찾게하는 계기가 됨니다.
  ② “기독교서양”은 21C. 세계속에 물질문명을 위시한 “기독교시대”
(christian Era) 를 남겼습니다.
  ③ “기독교서양은”은 기독교의 세계사적 과재를 남겼습니다.


(1). 기독교세계
 세계사의 목표를 “기독교세계”(Christian World)로 잡을 것을 Calvin과 Wesley는 강력히 주장하고 있습니다.(사2:2-4; 미4:1-5) (129-135,257-261) “기독교세계”는 “칼을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쳐서 낫을 만드는 전쟁없는 세계, ”각 사람이 자기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세계” 를 말합니다. 두 사람이 다 기독교세계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다 이 예언을 심각하게 받고 그런 “세계”를 향하여 걷기 시작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책」에서 “기독교세계”의 vision을 “기독교한국”의 비전으로 연결시켰습니다.
(133-134). “한국은 어차피 거짓과 사기로 가득한 것이 당연한 것이고 정직한 한국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에게 “한국인들은 다 거짓말쟁이다”라고 가르치지 말고 “한국인은 정직하고 믿을만하다”고 가르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21세기에 극비의 세계가 그 실제성을 들어내고 논리의 세계가 그 신기함을 날마다 나타냅니다. 그러나 평화의 세계는 바랄 수 없습니다 세계는 Augustine의 말대로 “자애”(amor sui)의 원리에 따라 “불의”로 꽉차서 저마다 “군림”하려고 아우성 침니다. 하나님께서 “미대륙”을 일찍이 준비 하셔서 세계속에 제한적 “안정”을 허락 하시어 파멸로 떨어지는 것을 겨우 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Calvin이 일찍 예언한 “자유시장경제” 원리로 “번영”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사에서 사라진지 200년이나 지난 로늘에“기독교서양”의 회복을 바랄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Calvin과 Wesley의 일치 한 충고 이사야-미가의 “기독교세계” 예언을 “시작”함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기독교인으로서는 이 세계 속에 이웃에 해 주지 않는 일으킴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2) 기독교세계사관의 중심은 “크신분부”

  우리는 위에서 많은 기독교세계사관을 열거 했습니다.「성경」은 세계사관으로 가득합니다. 그중 “기독교세계” (Christian World) 운동을 일으킬 것을
제안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크신분부”는 모든 “기독교세계사관”의 중심에 섭니다. 세계사의 목적은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 되는것”입니다. 역사의 의미는 역사의 목적이 줍니다 그러므로 세계사의 의미는 예수님의 명령에따른 “복음선교”가 줍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언역”의 성취에 대한 기뿐 소식입니다. 예수께서 오심으로 「구약」의 모든 예언이 다 성취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피로서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언약이 하늘에서 이루실 것에 대한“약속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언약”의 “성취”가 다 하늘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모든 “소원”이 다 이루어져서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모든 인생의 “기쁨”으로 넘치는 잔치“가 될 것이며, 하나님을 향한 ”감사“, ”찬송“, ”영광“의 잔치가 될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쉬면서 보며, 보면서 사랑하며, 사랑하면서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

                          2011년 12월 21일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한철하

4. 기독교세계사관의 타당성

  (1) Toynbee와 Cox
    (a) Toynbee 
  Toynbee와 Cox는 세계를 기독교 중심으로 봄이 마땅함을 사실적으로
입증 하였다고 봅니다 Arnold Toynbee (1889-?)는 21개의“문명사회”(civilization societies)들 중에 중국, 인도, 인다스, 이슬람, 4개 “문명사회”만이 2세대문명사회(2世代 文明社會)를 이루었고, 서양의 헬라-로마-기독교 문명사회는 3세대 문명사회(三世代文明社會)임을 지적했습니다. B.C. 6세기에 Pericules 시대 헬라 문명이 제2세대이고, 그것이 Alexander 대왕에 의해서 Hellenism 문명으로 전 지중해연안에 퍼졌고, 로마 제국이 이 문명을 받아 제국을 이루었고, 이 헬라-로마 문명이 기독교 서양에 의하여 중세말에 르네상스(Renaissance)를 통하여 제 3세대 문명을 이루어 오는데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Renaissance는 헬라-로마의 고전 문명의 연속이 아니고 Shakespear의 Hamlet이 자기 아버지의 군복입고 말타고 나타나는 “환상”과 같은 것으로서 그 성격이 전여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고전헬라-로마 문명은 아직 제2세대 문명으로서 인도, 중국, 인다스, 회교문명과 같은 수준의 것이고 Renaissance를 거치면서 오늘의 서양문명 즉 제3세대 문명이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b) Cox
  Harvey Cox는 그의「세속도시」(Secular City)에서 “시내산 언약”(Sinai
Covenant)으로 인해 오늘의 세속 문명이 이루어진 사실을 잘 설명 했습니다. “자연의 비 주술화”(disenchantment of nature), "가치의 비 성별화“(deconsecration of value), “정치의 비 신성화”(desacralization of politics)를 통해서 미신과 주술과 황제 숭배의 암흑 속에서 부족과 종족과 민족들을 구출하여 오늘의 세속주의를 이룩하였음을 분명히 합니다.

  (2) 세계사가 기독교 중심으로 형성
  기독교 세계사관의 타당성을 Toynbee와 Cox가 입증할 뿐만 아니라 다음의 사실들이 또한 그 타당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서양은 19세기
동안에 전 세계를 흡수함으로서 세계사화(世界史化) 되었고, 따라서 세계사가 기독교 서양에 의해서 주도 되었습니다. 전 세계가 서양의 과학기술 문명속에 흡수되었고, 더욱이 오늘의 21세기는 Calvin.이 주장한 “자유시장경제” 체제하에서 큰 번영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계사가 기독교 중심으로 전개 되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세계사의 중심에 기독교가 서 왔음은 “21세기를 위한 기도”(144)에 잘 나타났습니다. “암흑의 세계”, “우상과 강표와 퇴패의 세상” 속에 “의와 진리와 선하신 심판자, 축복자에 대한 신앙의 무리”, “온유하고, 선한 양무리”에게 “로마의 강권을 굴복시키고”, 기독교중세가 이루어진 일이 세계사의 중심에 기독교가 서 왔음을 보여줍니다. 요컨대 “오늘의 세계”가 다른 어느 “종교”나 “문화사회”에 의해서 형성됬다기 보다 “기독교서양”에 의해서 형성되었음을 봅니다. 그러나 “기독교서양” 자체가 세속화(secularization)되었고 18C. 하반기에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날이 갈수록 물질적 번영을 보이고 있습니다.

  (3) 기독교시대
  eha"기독교서양“은 오늘의 세계 속에 ”기독교시대“(Christian Era)를 남겼습니다. ”기독교시대“란 오늘의 인류가 신불신(信不信)을 막론하게 누리는 기독교의 혜택을 말합니다. 1500년 역사의 “기독교서양”은 참으로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큰 선물 입니다. 이로서
 
  ⓐ인류역사는 “존재론적통치문화” (ontocratic cultures)의 윤회적성격(cycli cal character)을 버리고, “수평적 성격”(lenear character)를 얻게 되었고, “복음화”를 향하든지 무“nihil"를 향하든지 세계사는 "개시과정”(開示過程)(opening process)을 가지면서 앞으로 전진하게 되었습니다.
 
  ⓑ 세속화된 “기독교서양”은 과확의 막대한 발전을 통하여 오늘날 인류에게 물질문명의 큰 혜택을 주었고,
 
  ⓒ 세계는 “하나의세계”로 “축소”되어가고 “긴밀화”되어 갑니다.
  ⓓ 또한 오늘의 인류가 누리는 기독교시대의 혜택으로 7일단위의 휴일제도, 노동중시, 계급타파, 민주화운동등을 들 수 있습니다.

5. 오늘의 세계속에서의 “기독교세계사관” 운동

  우리는 앞서 예거한 신구약 성경의 수많은 “기독교 세계사관”속에서  Calvin.과 Wesley가 다같이 강조한 이사야-미가의 “기독교세계”(Christian World)운동을 예수님의 “크신분부”를 중심으로 전개 할 것을 제안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세계 속에서의 그와 같은 “기독교세계관”운동의 “타당성”도 지적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21C.의 오늘의 세계가 그것을 얼마나 받아 드릴가를 생각하여야 할 것이며 또한 오늘의 세계 속에서 그와같은 “운동”을 전개하는 “의의”(意義)도 검토 하여야 하겠습니다. 우선 “오늘의세계”의 특징을 사실대로 파악해야 하겠습니다.
 
  첫째는 2차대전 까지 그리고 20세기 동안 견지 하여 오던 “西洋”의 우위가 더 유지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나 과학기술문명에 있어서 전 세계가 개발됨에 따라, 비서양국가중 일본만이 세계강국 속에 들어왔으나, 인구에 있어서 월등한 중국이나 인도등이 더 큰 강국으로 등장하여 한국도 그 탁월한 인적자원으로 소수 인구의 국가로서 G20에서도 우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둘째로 온세계가 “자유시장경제체제”로 모든 “가치”가 개발되고 교류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어느 한가지 원리로 오늘의 세계를 통일 한다든가 그 타당성을 내 세우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오늘은 “가치폭발”의 시대요, 다 차원적 인간생활의 시대요, 모든 “개인”의 “자립”의 시대라 하겠습니다.
  셋째로 위에서 이미  지적한대로 오늘의 세계는 “입자물리학”의 세계의 엄청난 위력을 나타 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극미(極微)의 세계가 그 실제성을 들어내고, 논리의 세계가 그 신기함을 날마다 나타냅니다 이에따라 일상생활의 양상에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으며, 세계가 축소되고 있으며, 온 인류가 한 공동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즉, 모든 가치분야가 세계화 되고 온 인류의 공동소유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넷째로 오늘의 세계는 “세속주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세상적 “가치”가 절대적인 위치에서며, “종교”는 문화나 사회표면에서 “개인”의 내부의 문제로 후퇴하였고, 그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문제로서 한 “가치분야”를 차지할뿐 그것을 전 사회에 수용을 요구할 수는 없는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전 사회의 공동의 관심은 “정치”나 “경제” 분야에 집중되고 여타의 분야는 공동성을 요구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위와같은 특징을 가진 21C.의 오늘의 세계에 있어서 우리가 제안하는 “기독교세계”운동이 타당한가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기독교세계”예언은 “칼을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쳐서 낫을 만들게 된다는”예언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평화가 세계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전 세계가 중 무장하고 미국의 핵 우산 아래 상대적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오늘의 세계는 “기독교세계”예언과는 완전히 상반된 상태에 있습니다. Calvin.은 이 예언의 완전한 성취를 이 세상에서 기대해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선인이 언제나 악인과 섞여 있으며 뿐만 아니라 선인도 완전함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세계를 향하여 “이웃에 해를 입히지 않는” 오늘의 출발을 하자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당연한 의무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그것을 성취케 하는 복음입니다. 복음은 제인을 선함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기때문입니다.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제안은 오늘의 세계에 있어서도 그대로 타당합니다. “세계사”가 그 방향으로 진행하여 나가야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크신 분부는 “기독교세계”가 이루워질 것을 목표로 하는 우리의 “첫거름”을 가능케 합니다. 결론적으로 “기독교세계사관”운동은 오늘의 세계에서도 필요하고 타당한 운동입니다

6.「성경」의 천국중심의 피조계 경륜

  (1).「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천국중심”의 책입니다.
첫마디가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시니라”입니다. 여기서 “하늘들”이 먼저 섭니다. 「구약」은 가나안을 위시하여 축복과 저주등이    세상것이 많으나 또한 “천국”을 목표로 제사함이 많으며 “천국중심”이 뚜렸함니다.「성경」의 마지막 말씀이 “마라나타”(주여 어서오시옵소서)입니다.  하늘로부터의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말입니다.「성경」은 피조계를 “보이는것”( 헬라어  ),과 “보이지않는것”(  헬라어  )로 나눕니다.(고후4:18) 그러나 “보이지 않는것”이 더 중요한 위치에 섭니다. “보이는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것은 영원함이라.”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잠시받는 환란”을 통하여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이루기 위하여 다름질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세계사가 잠깐 진행되고 있으나 마지막에는 “하늘이 불이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져서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일이 드러나게될” 것입니다.(밴후3:10) 그리고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마련하시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거 하시게될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고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것이나 곡하는것이나 아픈것이 다시 있지아니할 것임은 처음 것이 다 지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다 새롭게하실“ ( 헬라어  )때입니다.(계 21:1-5)

  (2). 예수님은 특별히 천국복음을 전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행하심이 전부 천국중심 이었습니다. 예수께서 한국에서 세상에 오심은 죄인을불러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세상에서 예수께서 향하신 모든 것이 십자가와 부활로 요약됩니다. 십자가로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로 새생명을 주셔서 천국인을 삼으셨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하심을 전하여서 죄 예수님의 구원사업을 계속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업은 죄인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들어감을 얻게하는 일 입니다.이 일이 역사속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세계사”의 의미가 이 한가지에 집중된다고 하겠습니다.

7. 하나님의 천국중심의 피조계 경륜과 기독교세계사관운동 

  (1). Augustine의「신국론」(De Civitate Dei)는 세계사를 천국 중심으로 본 대표입니다. Augustine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 속에서 순례하는 역사를 기록 했습니다. 그의 서문에서 아래와 같이 쓰고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도성(都城)이 이책의 주제다. 이 도성은 시간의
        흐름속에서 경건치 않는 자들 가운데 외국인으로 잠시 살고 있든지
        장차 영원한 처소에서 안식을 얻게 되든지 지극히 영광스러운 도성으로서
        최후의 승리와 완전한 평화를 얻게될 것이다.

  Augustine은「성경」의 역사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자세히 더듬어 내려가면서 각 시점에서 일어나는 세계의 역사와 대조시킵니다. 예컨대 아부라함때에 세계를 아세아와 유럽과 아프리카로 나누고 나라는 앗수루와 이집트와 유럽에 있는 씨키온을 들고있습니다(𝐗vΙ,17)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급에서 인도해 낼 때에는 Cecrops가 아덴의 왕이었고, Ascatades는 앗수루의 왕이었고 narathus는 시키온의 왕이었다고 합니다.(XⅴⅢ,) Augustine은 앗수투,애급,헬다,로마의 역사를 “하나님의도성”과 대비하여 자세히 논합니다.

  Augustine은 하나님 도성과 세상의도성의 원리를 다음과같이 대비합니다.
세상나라의 원리는 “자애”(amor sui)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언제나 “지배의 욕망” (cupiditas gubernandi) 때문에 언제나 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도성의 원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amor Dei)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평화와 의(義)가 있을 뿐입니다. Aujgustine은 하나님의 도성과 교회가 일치하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교회 속에도 세상나라가 들어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두 도성은 육적으로는(corporiter) 섞여있고 영적으로는(spiritualiter) 분리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지막때까지 두 도성이 섞여서 진행하다가 심판대에 이르리 “하나님의도성”은 영광과 평강으로 “세상의도성”은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Augustine은 세계사를 “엿새”로 구분합니다. 첫째 날은 아담으로부터 대홍수까지, 둘째 날은 대 홍수로부터 아부라함 때 까지, 다음에는 마태복음을 따라 아부라함 부터 다윗 까지가 셋째 날 다윗으로부터 포로때까지가 넷째  날은 포로때부터 그리스도 때 까지가 다섯째 날입니다. 여섯째 날은 그리스도 때 부터 세상 끝날 까지입니다. 우리는 현재 이 여섯째 날에 살고 있습니다. 제 칠 일은 영원한 안식의 때로서 하나님께서 쉬시면서 자신 안에서 우리 에게도 안식을 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때에 쉬면서 보며, 보면서 사랑하며, 사랑하면서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𝐗𝐗Ⅱ,30)

  (2). 우리가 위에서 논한 “기독교세계사관”은 외견상으로는 천국중심이 아닌것 같습니다. “세계사”에 그 관심이 집중 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기독교세계”운동도 이 세계가 “칼을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쳐서 낫을만드는 세상”을 이룩하는 운동입니다. 그러나 이 운동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또 하나님의 피조계 경륜의 목적은 “하늘나라”입니다.  이 세상의 목적은 천국입니다. 이 세상을 천국 하는일이 이 세상의 목적입니다. 이 일을 가능케하는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심은 죄인을 구원하여 이 세상을 천국화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천국복음”이 모든 “기독교세계관”운동의 원리요 원동력입니다.  위에서 우리는 “기독교세계”(Christian World)운동의 원리도 “크신분부”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8. 세속적 세계사관

 세속적 세계사관의 대표는 Karl Marx라 하겠습니다. 그의 세계사관은 “유물사관”(唯物史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Hegel의 “정신사관”(精神史觀)도 외형상으로는 신학적이요 기독교적이나 그 내용은 완전히 세속적 세계사관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신”을 “세계정신”(世界井神 Welt Geist)이라 하였습니다. Toynbee나 Cox도 기독교 세계사관의 타당성을 제공하고 있으나 그 내용은 완전히 세속적 세계사관입니다. Toynbee의 21개 문화사회들(civilization societies)들이 다 인간사회의 문명적 형태 들이고 Cox도 하나님의 시내산 언약을 논하나 그 관심을 사회의 “세속적”성격에 있습니다.  “세속적세계사관”은 그 본질상 바른 세계사관이 될수 없습니다. 세계사속에서 어떤 특수한 국면 하나만 가지고 마치 세계사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과장하기 때문입니다. Richard Niebuhr의「Christ and Culture」(1951)는 신정통주의 입장에서 이지만 모든 “문화단위”들의 “거짓보편주의”(false universalism)를 잘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문화의 변형자”(the Transtormer of culture)로 봄으로서 “세속적”성격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결론적으로 “기독교세계사관”만이 참된 “세계사관”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세계사관”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계사의 진로를 말하기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유 위에 계시고 “피조계” 전체의 주재 (主宰)이심
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피조계” 통치는 “천국중심”의 통치 이기 때문에
“천국중심”의 “세계사관” 만이 참된 “세계사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진리를 누구보다도 역시 예수께서 가장 잘 가르치셨습니다. “너히는 먼저 그의나라와 그의 의 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히에게 더 하시리라”(마.6:33)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9. 한국사관

  “한국사관”은 “한국사”와 구별되어야 합니다. “한국사”는 Calvin.이 말하는 “학문”입니다. 즉 “한국”에서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있었던대로 “기술”하는 “학문”입니다. 그러므로 “역사과학”(historical science)이라 하겠습니다. 가령 “임진왜란”에 대해서 양 쪽의 전세나 전쟁상황에 대한 기술입니다.    이에 반해 “사관”(史觀)은 “역사적사건”의 “의미”(意味)를 말합니다. “의미”는 “관점”(view point)에 따라 달리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관점”은 “과거”에 있었던 것에 출발점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임진왜란”의 결과 당시의 “한국사회”에 여러 가지 영향이 미쳤던 일들입니다. “관점”은 우리 인간의 “목적”에서 형성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전쟁은 “불의”한 것이었다. “부도덕적”이었다. 전쟁중에 “불미”(不美)한 일들이 있었다. 충무공의 “충성”을 찬양하는 일들이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사”를 “기독교의입장”에서 보는것이 “기독교적 한국사관”이라 하였습니다. 즉 “한국사”를 “기독교적으로해석”하는 일입니다. 우리 모임은 “한국사”를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을 연구합니다. 즉 “한국사”를 “기독교의 관점”에서 “해석하는방법”을 찾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 먼저 문제되는것은 “기독교의 관점”입니다. “기독교종교”는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믿고 죄사함 받아 거룩함을 얻어 사탄의 폭정과 죄의 사술과 악의 비참에서 구원얻어 천국으로 인도됨을 받는일“입니다. 사실 이와같은 입장에서 ”임진왜란“을 볼때 ”침범하는 일본사람들“이나 ”침범당하는 조선사람들“이나 다 예수믿고 구원 얻어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침범 약탈“은 ”불의“하고 ”범죄“입니다. 또한 ”침범“에 대비해서 잘 ”방어“하지 못한 일을 하나님앞에서 ”의“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침범“하는자나 ”침범“ 당하는자나 다 ”예수믿고 구원“얻어야 하였습니다. 물론 ”구원“얻어 ”화평“을 도모하고 서로 ”사랑“했어야 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한국”을 향하여 “복음전도”를 해야할 것을 주장하고 “기독교한국”(Christian Korea)을 제창(提唱)하고 있습니다. “기독교한국”은 한국사람이 다 “기독교교인”이 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아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한국”이 될것을 말합니다. Calvin.은 “칼이나 창” 즉 이웃에게 해를입히는 일을 중지하고 “보습과 낫”즉 이웃에게 선을 도모하자는 뜻으로 해석하고, 이와같은 “한국”이 당장에 올것을 기대해서는 아니되고 이와같은 “한국”을 향해서 “출발”하자고 해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