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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12-24 00:30
칼빈의 창조론(박해경)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8,242  

영역: 신학
키워드: 칼빈, 창조, 6일사역, 섭리, 영광, 선하심
칼빈의 창조론
Calvin's Doctrine of Creation

박 해 경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ACTS)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아신리 산 151-1
haggai52@hanmail.net

[Abstract] John Calvin's Doctrine of Creation shows the Christian viewpoint of the true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his creature. Calvin thinks that God exists in our whole universe and at the same time beyond it in reality. In Calvin's theology, we can see the very important fact that his real concern is not to say something interesting to modern mind, but to tell the biblical data as such and to teach the purpose of scripture as its own intention.

I. 서론
칼빈의 신학은 하나님 중심적이고, 구원 중심적이다. 그의 신학적 관심은 사람들의 흥밋거리에 맞추어 귀를 즐겁게 하는 교리논설이 아니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과 말씀사역으로 신앙을 일으켜서 구원을 얻게 하고, 회개와 죄 사함의 복음 진리를 전파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그리스도의 왕권에 우리가 쓰임 받게 하자는 목회적 신학을 주장한다. 창조론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목적이 원래는 영생복락을 주시려는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려는 것이며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칼빈은 창조 자체의 실체적 사실성을 믿으며, 피조물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본래적으로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신앙의 관계여야 함을 강조하고, 인간 외의 피조물은 모두가 인간을 위한 것임을 말한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다스리신다. 그리하여 칼빈은 법신론(Pantheism)과 이신론(Deism)을 극히 경계하며, 또한 바르트(Barth)적 사고, 즉 창조자체에는 관심없이 창조자와 그의 계약동반자 인간과의 언약관계에만 집착하는 식의 창조론이 아닌 “실체론적”이고 “신앙론적” 창조론을 전개하고 있다. 칼빈의 창조론은 철학자나 이교적, 세속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성경 자체의 증거에 철저히 의존하면서 창조의 의미와 목적을 기독교 복음의 본질적 이해에 입각하여 서술한다.

II. 철학자들의 창조론 비판
칼빈의 창조론에서 강조된 점은 일반적으로 어거스틴 이래로 교의학에서 말하는 “무에서의 창조”(creatio ex nihilo), “시간과 함께 창조”(with time, not in time), “하나님의 영광과 인류의 행복과 교육” 등을 다 포함하면서도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경외를 말함으로써 신앙적 유익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전 슈라이너(S. E. Schreiner)는 그녀의 칼빈 연구서에서 칼빈의 창조론에 나타난 몇 가지 특징을 열거하였다. 그것들은 삼위일체의 창조, 하늘에서 무활동 중에 갑작스런 창조가 아님, 순간이 아니라 6일 창조,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묵상 등이다. 존 머레이(J. Murray)는 칼빈의 창조론에 대한 논문에서 간접창조와 직접창조의 문제를 가지고 위필드와 더불어 씨름하고 있다. 한편 존 레이스(John H. Leith)는 도위(Dowey)를 인용하면서 창조자와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창조를 구속과 관련해서 설명한다.
칼빈의 창조론에서 우리가 구속과의 관련성을 생각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깊이 명상하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고, 우리에게 이성과 분별력을 주셔서 거룩하고 올바른 삶을 영위함으로 말미암아 영생복락(blessed immortality)이라는 궁극적 목적에 도달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칼빈은 우리가 처음 지음 받은 목적이 영생불멸을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파커(Parker)나 도위(Dowey)가 창조와 구속을 연결시키려는 것은 타당한 발상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창조는 창조 나름대로의 중요성과 교리적으로 독립된 위치를 가져야 하며, 구속의 교리를 위한 종속적 역할 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우리가 고찰한 바와 같이 칼 바르트의 영향을 받은 파커는 구속자에 대한 지식 속에 창조자에 대한 지식을 넣어서 통일하려고 했다. 바르트는 창조 자체에 대해 아무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 하늘에 상응하는 하나님과 땅에 상응하는 인간, 그리고 하늘과 땅의 연결고리가 되는 은혜계약을 이루신 그리스도만을 강조할 뿐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만 알면 되지 그 이상의 창조론은 알 필요가 없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독자적인 우주론을 몰라도 된다는 식이다. 바르트는 하늘은 하나님의 존재와 행위에 상응하는 것이고, 땅은 인간의 존재와 행위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늘과 땅의 연결(conjuncton)은 하나님과 인간의 존재 및 행위가 만나는 “계약”에 상응하는 것이다. 창조론은 바로 이 한계 내에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칼빈은 창조 자체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성경의 매 페이지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와 선하심과 그가 악한 자에게 내리시는 공의와 심판을 볼 수 있듯이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영원성과 선하심, 권능, 지혜, 우리를 향하신 자비, 공의와 심판, 그리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섭리적 돌보심도 깨닫게 된다. 칼빈의 창조론은 섭리론에 연결되며,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감사, 찬양을 우리 신앙의 유익으로 삼기 위한 창조론을 전개하는 것이다. 따라서 범신론과 이신론이 배격되며, 운명론과 여러 가지 철학에서 논하는 창조론은 이교도들의 우둔한 사상으로 비난한다. 칼빈은 먼저 이교도들과 철학자들이 말하는 창조와 창조자에 대한 어설픈 주장들을 비판하고, 쓸데없는 호기심에서 나오는 질문에 대해서도 성경의 한계를 넘지 말라고 충고함으로써 경건한 교리를 논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우주정신으로서의 하나님”(Deum mentem esse mundi)이 단명한(ephemeral) 것이었으므로 우리가 회의(懷疑) 가운에 방랑하지 않으려면 철학자들의 관점보다 더 깊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칼빈은 말한다. 창조의 역사(사실)에 의존하고 있는 교회의 신앙이 참되고 올바른 하나님 외에 어떤 다른 신도 찾지 않도록 우주의 창조자요 설립자이신 하나님을 바로 알려주기 위해서 모세가 기록한 유일하신 하나님의 창조사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 창조사(創造史) 속에는 신자들이 끊임없는 세월의 연속에 의거하여 인류와 만물의 최초의 기원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도록 “시간”(tempus)이 명시되었다. 우주의 시작이 일단 알려짐으로써 하나님의 영원성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며, 우리도 하나님의 영원성에 대한 경이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칼빈은 무익한 호기심에 빠지지 말고 어거스틴의 충고를 들으라고 한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뜻보다 더 고상한 사물의 원인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잘못을 범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사고는 하나님의 뜻(성경) 안에 한계를 두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한다.
과연 창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철학자들이나 여러 이방종교들의 신화에서 말하는 물질영원설(唯物論)이나, 이원론(Dualism), 유출설(Emanation Theory), 진화론(Evolutionary Hypothesis)등이 아니고 성경이 증거 하는 창조의 이야기(歷史)에 의존하는 것이다. 철학에서는 창조에 관하여 물질과 영은 나란히 병행한다고 주장하는 이원론(二元論)을 말하거나 기껏해야 이신론(理神論)에 떨어지고, 혹은 범신론(汎神論)에 빠질 뿐이다. 헬라의 이원론은 기존의 재료가 있어야 하고(無에서의 창조가 아니다-무엇이든 재료가 필요하다-그것이 창조신 자신이든지 다른 신의 몸이든지 간에), 또 창조행위나 그것을 보존하는 관여(關與)가 없는 것이 문제이다. 한편 이신론(Deism)의 경우에는 신의 창조가 있으나(關與 有), 보존(즉 攝理)이 없다. 신학자 하비 콕스(H. Cox)가 기독교와 타종교의 차이를 세 가지로 말하면서 “자연의 비마법화(非魔法化)로서의 창조”(Creation as disenchantment of nature)를 잘 말했으나 창조가 “하나님”의 창조라는 사실을 덜 강조함으로써 칼빈의 우려를 다시 한번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 한 분만이 참된 창조자이시며, 그 분의 지혜와 권능과 선하신 의지의 결과로서 가장 좋은 창조역사가 발생하였음을 믿고 경탄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창조론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칼빈에게 배워야할 바른 태도이다. 이방 신화나 철학이나 여러 종교에서 말하는 창조와 우주의 기원에 대한 주장들은 그것들의 근원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거짓된 것이다. 바벨론의 창조설화는 성경의 창조 기록과 유사하지만 엄밀히 비교하면 성경의 증거에 비해 매우 유치하고 권위가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철학자들의 주장도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은 오래가지 못하고 단명한다고 칼빈은 잘 지적하였고, 가장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는 헬라 철학에서 나온 로고스 이론도 덧없는 것이라고 일축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증거 하는 창조기록과 창조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을 배우는 데에 집중하여야 한다.

III. 6일 사역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
칼빈은 일반적으로 조직신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6일창조, 소위 Hexahemeron에 대해서 자세히 논하지 않는다. 칼빈은 오히려 6일창조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깨닫고 감사할 것을 강조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6일 동안에 이루어졌다고 말했는데, 이러한 사실에 의해 우리는 일체의 허구를 물리치고 우리의 온 생애를 한 분 하나님의 역사를 묵상하는 일에 드리도록 하는 일에 있어서 싫증나지 않도록 그의 사역을 6일로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라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을 어디로 향하든지 하나님의 사역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최고로 완벽해서 더 이상 더할 것이 없으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보시기에도 심히 좋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주의력(attention)이 자주 변하고, 경건한 생각은 빨리 사라지기 쉬운가를 본다. 그래서 우리의 이성은 신앙에 순종하여 제 7일의 성별이 우리를 초대하여 침묵을 배우게 되기 전까지는 마치 이러한 6일 창조의 과정이 하나님의 능력에 맞지 않는 것처럼 불평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주에 모든 선한 것을 풍족하게 주시기 전까지는 아담을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점, 바로 만물을 창조하신 그 순서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류를 향하신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부지런히 묵상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만일 하나님이 아직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땅에 두셨다면, 그리고 빛이 없는데 그에게 생명을 주셨다면 그것은 아담에게 그의 복지를 위해서는 불충분하게 행하신 처사로 보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류를 위하여 해와 별들이 운행하도록 하셨고, 땅과 물과 공중에 각양 생물들로 가득 채우셨고, 풍성한 과실들을 나게 하사 식물로 삼기에 충분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향한 놀라운 선하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즉 모세는 창조의 기록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의 영원하신 지혜와 성령에 대해서도 증거하므로 우리는 그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꿈꾸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하나님이 6일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보다 쉽게 묵상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한다. 또 인간이 무언가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할 것이라는 점을 증거하시고, 우리 인간이 본래 존엄했었다는 점을 알도록 하신 것도 첨부한다. 그래서 인간은 “소우주”(microcosmos)라고 고대인들이 불렀던 것은 다른 피조물에 비해 인간이 신적인 지혜와 공의, 선 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성 속에서 빛나고 있는 신적인 질서를 나타내는 지성과 의지와 모든 감각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점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드셨고, 특히 그들에게 후손에 이르도록 복을 주셨다. 이 창조 기사에서 우리는 모든 것이 창조되어진 목적을 알게 된다. 사람에게 필요하고 편리한 모든 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주어진 것이다. 창조의 순서에 있어서 인간을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돌보심(배려, solicitude)이 두드러지고 있음을 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인간이 필요로 할 것을 모두 다 세상에 채우셨을 뿐 아니라 엄청나게 풍요하도록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부요하였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가 존재하기 이전에 그토록 돌보아 주셨다면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생활에 필요한 음식과 다른 것들이 결핍되도록 절대로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이다.
칼빈은 6일 창조의 기록에서 먼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자비와 사랑을 배우고 경건한 마음으로 감사할 것을 강조하였고, 다음으로는 우리가 창조자 하나님 외에 어떤 다른 우상 신이나 잡신들을 생각하지 말라는 점에 대해 주의시켰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바실(Basil)의 글에서 매우 유익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바실은 그의 설교집(Homily) 6에서 6일 창조 중 “하늘의 빛들의 창조”(Creation of the Lights of the Heavens: on the Hexaemeron)에 관하여 설명하는 중에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남기고 있다-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낮과 밤을 구별하고, 땅을 비추기 위하여 하늘의 궁창에는 빛들이 있을지어다”(바실은 70인역을 사용하였다)라고 하셨다. 하늘들과 땅(지구)이 먼저 나왔고, 다음에는 빛이 창조되었으며, 낮과 밤이 구분되었고, 그 다음에는 궁창과 마른 땅이 드러났다. 물이 고정된 곳으로 한정되어 모이게 되었다. 땅에는 그에 알맞은 과실들이 충만하게 되었다. 셀 수 없을 정도의 채소와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이 땅을 장식하였다. 그러나 태양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고 달도 그러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태양을 제일 원인(the first cause, 즉 神)이나 빛의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고,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이 태양이 땅으로부터 자라나는 것들의 산출자라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네 번째 날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하시고, 이어 하나님은 두 광명을 만드신 것이다-이러한 바실의 견해는 매우 사려 깊은 것 같다. 간단히 말해서 바실은 태양과 달이 있기 전에 식물들이 나타난 것은 우상숭배를 막기 위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체들을 신들로 믿고 식물은 이런 천체들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칼빈이 위에서 말한 대로 우리는 6일 창조의 교리에서 두 가지를 배울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돌보심이며, 다른 하나는 창조자라야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IV. 창조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하심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창조물 그 자체가 가장 “아름다운 극장”(pulcherrimum theatrum)이다. 우리가 눈을 어디로 향하든지 보게되는 만물이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창조하신 목적을 경건하게 명상한다는 것은 신앙을 위한 최고의 증거는 아니더라도 자연의 질서 가운데 첫째가는 증거가 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지 참된 믿음으로 알기 위하여 우주 창조의 역사를 파악하는 일은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칼빈은 창조에 대한 교리적 요약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천지를 무(無)로부터 창조하셨고, 이어 모든 종류의 생물과 무생물을 만드셨으며, 놀라운 계통으로 무수하게 다양한 것들로 구분하셨고, 각 종(種)들에게 고유한 특성과 할당된 기능, 지정된 위치와 지위를 부여하셨으며, 만물이 부패하게 되어 있기는 하나 그래도 마지막 날까지 보존하도록 대비까지 하셨던 것이다. 또 어떤 종류는 비밀스런 방식으로 기르시고, 번식 능력도 주셨다. 이리하여 우주라고 하는 하늘과 땅은 넓고 화려한 집과 한없이 풍부하고 다양하게 아름다운 만물로 장식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아름다움과 위대함과 많은 재능들로 단장하여 하나님의 가장 뛰어난 걸작품의 표본으로 창조하신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실로 우주를 만드시는데 나타난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 권능, 공의, 선하심을 적절하게 설명하려고 한다 할지라도 그 어떤 미사여구를 가지고 이 광대한 일을 충분하게 설명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거룩한 명상으로서 계속적으로 몰두하기를 바라실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그 피조물들 안에서 보여주신 분명한 능력들을 감사하고, 잊지 말아야 하며, 이 창조의 사역을 자신에게 적용해서 생각하고 마음 속에서 깊이 감동하며 하나님이 창조자라는 사실이 신앙적으로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위대한 예술가이시며, 권능자이시고, 지혜자이심을 깨닫고, 우주 안에 드러나고 있는 이적들과 선하신 표징들, 지혜의 증거들을 살펴야 한다.
그런데 칼빈은 천지창조의 사실에서 신앙적으로 보다 더 유익한 진리를 가르치려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모든 일을 우리의 유익과 구원을 위해서 정해놓으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우리 자신에게서는 물론 그가 우리에게 베푸신 큰 자비하신 일들에게서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느끼고 스스로 각성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에게 간구하며 그를 찬송하고 사랑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창조의 순서에 의하여 분명히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찬 순간에 창조하실 수 있으나 그렇게 하시지 않고, 또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서 각 종류를 만들 수도 있으나 그리하시기 보다 6일 창조로 이루신 것은 의미 없는 일이 아니었다. 이미 우리가 앞에서 논한 바와 같이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인간에게 이롭고 필요한 것은 다 준비해 놓으셨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배려인 것이다. 태어나기도 전에 그렇게 배려하셨다면 지금 우리를 보호하시고 돌보실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염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에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하거나 떤다는 것은 불경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자라고 부를 때마다 우리는 그의 창조에 대한 섭리는 하나님의 손과 권능 안에 놓여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에 맡겨져 양육되는 자녀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우리는 항상 모든 선한 것 자체를 하나님께로부터 만 기대하고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것이 결핍된 채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는 사실을 완전히 믿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한다. 무엇이든지 그에게만 간청하고, 무엇이든지 받은 것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감사를 돌려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선하심에 이끌리어 전심으로 그를 사랑하고 섬기기 위하여 힘써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칼빈의 신학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 드리는 신학임을 알 수 있다. 칼빈은 그의 창조론에서 결국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과 자비를 깨닫자고 하였으며, 하나님의 창조사역 가운데서 그를 찬양하고 그에게만 영광을 돌리고, 그에게만 무엇을 구하자고 하였다. 우리는 흔히 무엇을 구할 때에 간구는 하나님께 하였으나 은근히 사람으로부터 오는 응답을 기다리게 되고, 사람과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칼빈의 창조론에서 우리는 신앙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자비를 바라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또한 신학이란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것이 목적임도 알게 된다. 해방신학이나 정치신학은 환경에서 일어난 일종의 원망과 불평에서 기원한 신학이므로 신학이라기 보다는 윤리학이나 사회학에 가깝지만 칼빈의 신학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V. 창조론과 섭리론
칼빈은 그의 신론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강요 1권에서 별도의 신적작정론(Doctrine of Divine Decrees)이나 예정론(Predestination)을 다루지 않는다. 예정론은 오히려 구원론인 3권에서 후반부(III. 21-24)에서 논하였고, 작정론은 독립적인 부분으로 논하지 않은 채 여기저기서 하나님의 절대적 의지와 주권을 믿는 신앙적 배경을 통해서 각 논술 속에 스며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에른스트 트뢸취(E. Troeltsch)는 칼빈이 하나님의 특성을 절대적 주권적 의지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고 보았고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한 전형적인 하나님 중심적 해석이다.
헌터(Hunter) 역시 칼빈에게 있어서는 모든 교리가 신론 위에 건설되었으며, 칼빈의 사상은 모든 것이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지배된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전능하심은 그의 신학의 선결조건이었다. 칼빈의 중심 사상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학이라고 헌터는 단정한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지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칼빈이 그의 모든 신학 영역에 적용시키는 원리라는 것이다. 여기에 기초하여 헌터는 칼빈이 예정론과 섭리론을 처음에는 묶어서 취급했으며(강요의 초판과 2판에서) 나중에 별도로 다루었으나 양자가 하나님의 주권교리에 속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정론은 개개인 인간의 궁극적 운명에 대한 하나님과의 관련성을 다루는 것이며, 섭리론은 지금 여기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처분에 관하여 다루는 교리라고 한다. 그것은 신적작정(Divine Decrees)의 경험적 차원이다.
섭리는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더 상세하게 취급하며, 예정이 영원한 운명에 초점을 두나 섭리는 영원한 작정과 최후의 심판까지의 모든 사건들의 연관 속에서 크고 작은 일들과 그것들의 연계성까지도 살핀다. 하나님은 일어날 모든 일을 다 아시며, 그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이런 일들이 발생하도록 하시며 그의 목적대로 되어지도록 인도하신다. 단지 미리 보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지도록 결정하신 것이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그가 정하셨기 때문에 그는 미리 아시는 것이다. 모든 사건, 사고(생각), 감정, 감동까지도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에 귀착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작정의 교리에서 나오는 파생적 교리라고 할 수 있으므로 하나님 중심적 해석은 합당한 것이며, 대다수의 정통신학자들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현대신학에 와서 하나님의 주권이나 예정과 신적작정을 무시하고 인간의 의지와 자율성을 강조하여 정통 칼빈주의 신학을 경원하면서 이로부터 떠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칼빈을 비판하는 많은 학자들은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견해에 동조하여 칼빈의 하나님은 비록 사랑과 공의에 대한 관념을 보존하려고 하는 시도는 하고 있으나 사실은 사랑이나 공의가 전혀 없는 폭군의 모습만이 나타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래서 섭리론에 대해서도 하나님 중심적이 아닌 새로운 해석들이 많이 나타났다. 니이젤은 그리스도 및 교회 중심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은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만물을 통치하시고, 이 세상에서 교회를 지도하고 유지하기 원하여서 자연과 역사의 운행을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칼빈의 섭리론에서 교회는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의 실제적 대상이다. 이 논제 속에서 창조와 섭리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집중되어 있음이 분명히 인식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니이젤은 바르트의 영향을 받아서 섭리론도 기독론적으로 또한 계시론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였다.
바빙크(Herman Bavinck)는 철저한 칼빈주의자이면서도 특별섭리 보다는 일반섭리를 많이 강조하였고, 챨스 파티(C. Partee)는 칼빈의 주된 관심이 특별섭리라고 하였으며, 부스마(W. Bousma)는 칼빈이 스콜라적 미로와 인문주의적 심연을 동시에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주장했다고 한다. 한편 도위(Dowey)는 칼빈의 섭리론을 다루는 책은 아니었으나 그의 신지식론에서 칼빈이 신앙으로부터 예정을 보고 예정으로부터 섭리를 보았다고 주장하였다. 파커(Parker)는 칼빈의 섭리 개념에서 신적 원인과 지상적 결과 사이의 관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최근에 슈라이너(Schreiner)는 섭리론을 보다 상세하게 연구하였는데, 거기서 그녀는 보하텍(J. Bohatec) 이전의 학자들은 칼빈의 섭리론을 칼빈의 전체 체계 속에서만 다루었지 다른 교리들과 별도로 취급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슈라이너는 보하텍이 예정론은 칼빈의 중심 교리이지만 교리의 출발점은 아니라고 했다는 사실에 착안한다. 보하텍에 의하면 섭리 교리는 “뿌리와 같은 교리”(Stammlehre)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우리가 예정, 율법, 그리스도의 사역, 은혜의 수단에 대한 전제들을 발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슈라이너는 섭리론을 예정이나 그리스도의 사역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창조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을 근본 교리로서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책에서 칼빈의 신학을 지나치게 창조에 집착하여 논하는 경향을 많이 볼 수 있다. 파커가 구속자로서의 지식에 편중하였다면 슈라이너는 창조자체의 중요성에 대한 지식에로 기울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섭리론을 칼빈 자신이 중요하게 논한 것은 그의 교리 서술 방식의 하나인 교리의 신앙적 유익 때문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견해가 아닌가 생각한다. 예정론과 마찬가지로 칼빈은 교리가 가지고 있는 내용적인 중요성과 더불어 그 교리가 부여하는 영적, 신앙적 유익과 교회의 교화를 위한 목회적 배려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고 보는 것이 이상에서 논한 여러 학자들의 주장에서 제시되지 못한 중요한 요소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적 해석과 그러한 신본주의 “신앙”을 일으키기 위한 교리로서 해석하는 섭리론이라야 칼빈 신학에 대한 올바른 견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창조와 섭리를 하나의 교리로서 묶어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두 교리는 구별은 되나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칼빈은 그의 섭리론을 전개할 때에 과거의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무에서”(ex nihilo) 창조하셨으며, 창조한 세상을 그의 능력으로 보존하시고, 개개의 피조물을 다스린다고 한다. 하나님은 순간적으로 창조 사역을 마쳐버리시고 쉬는 분이 아니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는 불가분리적으로 묶여 있다. 칼빈은 그의 섭리론을 말하기 시작하는 그 첫 페이지 제목 부분부터 창조와 섭리를 하나로 묶어서 논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세상을 그의 섭리로서 돌보시고, 보호하시며 각 부분들을 다스리신다.”(Deum sua virtute mundum a se conditum fovere ac tueri, et singulas eius partes sua providentia regere). 그리고 본문의 처음부분에서도 다시 강조한다. 만약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단번에 완성하신 순간적인 창조자(mometaneum creatorem)라면 그런 생각은 차갑고 황량한 생각일 것이며, 우리는 특히 우주의 시작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의 계속적인 상태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권능의 현현이 빛나고 있음을 보고 있다는 점에서 속된 사람들과는 달라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섭리론을 말하면서 이성과 신앙의 명백한 차이를 지적한다. 이성은 기껏해야 창조 자체에서 머물고 만다는 것이다. 불경한 자들도 땅과 하늘을 바라봄으로써 그들의 마음(지성)을 창조자께로 들어 올릴 수밖에 없으나 신앙은 이보다 더 깊이 나아간다. 육체적 감각은 하나님의 창조에 나타난 그의 권능에 부딪히면 거기에 멈출 뿐이다. 기껏해야 창조자의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을 숙고하고 명상할 뿐이다. 그것은 운동력의 근원이 되는 어떤 일반적인 보존과 지배의 활동력만을 생각한다. 하나님과 그의 손길이 아니라 그 에너지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이보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창조자로서 뿐만 아니라 영원한 통치자이며, 보존자라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즉 하나님은 창조자이면서 동시에 섭리자로서 “하늘의 체계”(혹은 구체, Orbis machinam, 세계의 구조=mundi machina)뿐 아니라 그것의 여러 부분들을 우주적인 운동에 따라서 움직이게 하시고, 그가 만드신 모든 것은 가장 보잘것없는 참새 한 마리까지도 보존하시고, 양육하시며, 돌보신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래서 칼빈은 시 33:6과 13을 연결해서 창조와 섭리의 하나되는 연결고리를 다윗의 입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진리로 이해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이 두 구절을 묶어서 생각하여 본다면 하나님이 세계의 창조자이시므로 세상 만사를 돌보신다는 것이 가능하고,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을 돌보시기 때문에 세계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수긍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섭리론에서 우리가 반드시 유의해서 알아두어야 할 사항은 창조에서 멈추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은총을 알려주는 그 특별하신 돌보심을 전혀 맛보지 못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신론(理神論)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멈추는 사상이기에 배척되어야 하고, 웨슬레가 말한 바와 같이 종교적 상태에 있어서 가장 나쁠 수도 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성경적인 바른 관점을 확립하기 위해서 창조자와 섭리자를 한 분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필요하다. 창조자와 구속자 하나님이 한 분 하나님이시듯 창조자와 섭리자도 한 분이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믿음은 “하나”라고 하는 뜻이 더 확실하게 되는데,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그의 창조사역, 섭리사역, 구속사역, 심판사역이 모두 하나의 작정에서 나오고, 하나의 의지에서 나왔으며, 한 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믿는 “하나의 신앙”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VI. 결론
칼빈의 창조론에서 우리는 창조 자체의 중요성과 아울러 창조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볼 수 있다. 기독교의 창조 교리는 만물의 근원이 어디서 유래하는 가를 보여주고,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달리 어떻게 존귀한 존재가 되었는지를 분명히 알려준다. 지면관계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다루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자연인 그대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로 회복될 때 참 인간이 된다. 따라서 칼빈의 창조론에서 인간 창조가 중요한 교리를 구성하는데, 그는 인간 영혼의 실재성과 천사와 마귀의 실재성도 주장한다. 이러한 칼빈의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의 피조세계는 물질세계 뿐 아니라 영적세계까지도 언급하여야 하나 여기서는 창조론의 기본적 구성 요소만을 다루었다.
칼빈은 바르트와 달리 우주 만물과 인간의 피조성에 있어서 그 자체적 존재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인간에게 그 중심성이 있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고 영생복락을 명상하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순종하면서 그분에게만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 따라서 이교도의 철학이나 세속적 이론들이 인간의 자율적 사고에 입각하여 주장하는 바 우주 자체 내의 진화적 능력이나 발전 진보를 주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