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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6-24 21:53
단군=욕단, 성경적인가?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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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욕단설(說), 왜 문제인가

 

한때 한국 교회에 단군이 곧 단 지파라는 일부 황당한 주장이 떠돌던 때가 있었다. 가나안 족속들을 굴복 시키지 못한 지파요 요한계시록에서도 사라진 이 부끄럽고 불행한 지파가 과연 단군 계열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그런 때문인지 단군-단지파설은 수그러들었다. 다만 비록 신화이기는 하나 단군 신화에서 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삼위일체의 흔적)를 찾아보려는 윤성범의 시도가 있었다. 한철하 박사는 이 문제에 대해 단군신화의 삼신론과 경교의 삼위일체론을 형식적으로 대비시킨 것을 비판하였다. 네스토리우스파의 경교가 중국 대륙에 들어온 것은 네스토리우스(활동 기간 428-451경)가 정죄된 이후였다. 윤성범의 이 같은 주장이 단군-욕단설에서 온 것은 아니다. 고조선이 역사적 실체이기는 하나 단군신화는 고조선 설립 이후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신화적 각색이 이루어져 오는 과정에서 경교와 접촉된 신화임을 의미한다. 이것이 불교 승려였던 일연의 삼국유사에 묘사된 단군신화다. 즉 고조선의 존립 기간, 왕성의 이동에 대한 추적 그리고 단군신화의 비신화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신화적 단군을 기독교 신앙화하려는 시도가 부활하였다. 곧 단군은 셈족 아르박삿의 후손 에벨의 위대한(?) 후손 욕단이라는 주장(『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 유석근 저, 48쪽)이 다시 나와 한국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기독교진리수호협회(기진협 회장 예장합동 림헌원 목사)는 이 문제의 토론을 위해 유 목사에게 지속적 기회를 주었으나 매달 참석을 기피하더니 급기야 참석을 거부하고 필자의 실명을 거론하며 신학 토론이 아닌 고(故) 박형룡 박사나 고 하용조 목사의 이름 뒤에 숨어, 진지한 토론을 하려하지 않고 필자를 궤변의 조 씨라 지칭하면서 인신공격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고인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자신을 보호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돌아가신 분들을 모독하는 것이니 조심함이 옳다. 솔직하게 자신의 입장을 논증해야 한다. 이 토론의 실체는 욕단이 정말 단군이냐(위 책, 48쪽)는 문제이고 그것이 성경적 신앙과 신학에 무슨 의미를 주느냐다. 따라서 언제든지 이 문제는 책임 있는 목사라면 한국 기독교 안에서 그 신앙적 평가를 위해 기꺼이 토론해야 하는 주제인 것이다. 기름부음 받은 신사도 운동가들의 예언 기도를 받고 책(유석근의 위 책, 13-14쪽)을 쓰기 시작하였다고 하니 간단한 성경적 평가를 하고자 한다.

 

 

 

 

욕단-단군설의 성경적 문제점(비성경적 짜깁기)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다. 즉 모든 기독교 신앙과 교리는 유치한 신화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의해 판단 받아야 한다. 그런데 단군-욕단설에 있어 욕단은 성경의 인물이고 단군은 신화적 인물이라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단군이 신화가 아니라고 역설하는 사람들이 있다. 단군이 신화가 아니라고 하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욕단은 에벨의 후손이다. 유석근 목사 말대로 욕단이 단군이라면 환인의 아들 환웅은 아브라함의 조상 에벨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 에벨 즉 신의 아들 환웅은 중동 지역이 아닌 태백산으로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내려왔다는 해괴한 판타지가 성립된다. 목사가 신(神)인 환인의 아들 환웅과 여인이 된 암콤(성경 에벨의 아내 곧 아브라함의 6대조 할머니가 인간으로 환생한 곰이 된다) 사이의 아들로 태어난 단군을 욕단이라 하는 것은 성경을 희화화시켜버리는 일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타난 욕단 즉 단군의 후손들 알모닷, 셀렙, 하살마웻, 예라, 하도람, 우살, 디글라, 오발, 아비마엘, 스바, 오빌, 하윌라, 요밥은 모두 우리 조상들로서 동방의 만주 태백산까지 몰려와 그 아래 모여 살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이들 왕족 성씨(단군 즉 욕단 자녀)들은 현재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한민족 역사상 왕족 성은 고려 왕씨, 발해의 대씨, 전주 이씨를 포함해도 12성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왕족 성씨 가운데 고조선을 배경으로 한 성씨는 오직 한(韓)씨 하나다. 한반도에서 가장 연륜이 깊은 왕성(王姓)인 것이다. 그런데 이 청주 한씨는 옛 고조선이 아닌 정확하게는 한씨 조선(소위 기자조선, 주전 810-195)을 배경으로 하는데 오늘날 단지 한민족 전체의 1.6%에 불과하다. 욕단의 형 벨렉의 5대 손인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가족 70여명이 애굽으로 들어간 이후 400여년 만에 남자 장정만 60만 명이 넘는 대(大) 인구(아마 전체 300만 명을 초과하는 민족)으로 불어난 것을 기억하라! 그렇다면 한씨 조선(주전 약 810년) 이전의 단군 단씨들과 욕단 자녀들 왕손 성씨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그들의 별난 욕단 신앙과 그 후손들을 기록한 족보는 왜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단군보다 2천년 이상 후발 왕족 성씨들인 경주 김씨, 김해 김씨, 박씨, 이씨 만해도 전체 인구의 45%가 넘는다. 제 2 히브리 선민이라는 단군-욕단 족보는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세계 최고 족보 민족인 우리 사회 어느 성씨에 그 위대한 왕성(王姓)의 흔적이 남아있는가? 최고(最古) 왕성이었으니 어떤 식으로든지 국내 여러 성씨 족보 가운데 욕단과 그 후손들의 흔적이 남아있어야 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위대한 선민이요 위대한 조상 욕단 후손(?)임을 왜 청주 한씨나 어떤 성씨 족보(일부 기씨, 선우 씨)에서도 기록하지 않은 것일까? 단군-욕단 논리를 따를 경우 우리 민족이 아니라 이들 욕단 후손들은 모두 한반도에 진입하지 않고 몽땅 중국인화되어버렸다. 즉 우리 민족이 아닌 일부 중국인이 곧 욕단 후손이 되어버리는 것이다!정말 세상 고고학자들과 성서고고학자들이 웃을 일이다.

 

단군, 곧 욕단이 자녀들을 이끌고 야곱이 애굽으로 들어가듯 파미르고원과 천산산맥을 넘어 타클라마칸 사막과 고비사막을 지나 중국도 아닌 태백산 밑으로 왔다는 소설을 누가 믿겠는가? 역사적으로 천산산맥과 파미르고원을 제대로 넘은 집단 일행은 주후 740년 경 중국 당나라 장수가 된 패망한 고구려가문출신 고선지 장군이 이끌던 군대들이었다. 그들 당나라 군대의 눈물겨운 등반기는 유명하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동방으로 온 길은 파미르고원이나 천산산맥이 아니라(그 험난한 길로 들어가면 중국 대륙으로 들어가게 된다) 즉 우리 민족 주류는 (중국민족이 들어간 길이 아니라) 유목민(스키타이, 흉노, 훈족으로 지칭되던 우리 민족과 유난히 닮은 민족)들의 주 무대 곧 야벳의 후손들인 마대, 마곡, 두발, 메섹 등의 주 무대였던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윗 비단길)를 통해 몽골과 만주 지역으로 쉽게 들어왔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문제는 이들 일행이 욕단(단군) 가족이라고 믿으면 성경적으로 더욱 심각한 참사가 일어나버린다는 데 있다. 즉 욕단 후손들이 주로 아라비아반도(현 사우디 지역) 지역에 머물렀다고 하는 성서고고학자들의 오랜 연구 결과들을 무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유 목사 책의 전반적 흐름은 승려 일연의 삼국유사 속 단군신화, 환단고기, 단군교, 증산도의 다양한 주장들, 인터넷에 범람하는 한민족고대역사에 흥미가 많은 딜레탕트 네티즌들의 온갖 야사(野史)들을 성경 욕단이라는 인물에 짜깁기하여 연결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 노고는 인정하나 성경적 진리나 작품은 아닌 것이다.

 

 

 

욕단-단군설의 역사적 문제점(수메르족이나 단군신화나 서로 다른 색깔의 비성경적 문화)

 

인류 최초의 문자사용 민족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메르족으로 알려져 있다. 단군-욕단설의 연결고리를 위해 유 목사는 단군의 일파 가운데 일부가 시베리아 알타이까지 왔다가 고향 메소포타미아로 되돌아가 이들이 수메르족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수메르족은 욕단(단군) 분파라는 것이다. 수메르는 다신론(多神論) 신화족이었으며 비성경적인 점성술이 난무하고 잔인한 순장(殉葬)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허황된 단군신화와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신화체계를 가진 문화였다. 3,600명에 달하는 그들의 신들은 대단히 변덕스럽고 감정적인 존재들이었다. 노아 홍수 이후, 노아는 600세 이후 350년을 더 살면서 인류 타락과 하나님의 심판과 구속의 언약을 후손들에게 가르쳤을 텐데, 짧은 시기 동안 어떻게 또 다시 인류가 그렇게 하나님과 쉽게 멀어질 수 있었는지 그들의 타락상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이들 수메르 신들의 이름은 성경의 하나님 이름과 너무도 멀어져있었다, 또한 단군신화의 신 이름과도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이 머리가 검고 씨름을 하고 교착어를 쓰고 태음력을 쓴다는 것이 우리 민족이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머리가 검고 태음력을 쓰며 교착어를 가진 민족은 허다하다. 율례도 달랐다. 성경의 규범이 계시 중심의 신앙 율례인데 비해 수메르와 고조선의 잔존하는 법규는 인간적, 세속 규범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들 두 문명의 민족들이 성경적이고 복 된 민족이라는 아무런 성경적 증거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설령 정말 이들 수메르족이 우리 민족의 갈래라면 우리 민족은 선민은 커녕 단지파-단군 커넥션 못지않게 노아 홍수 이후 급격하게 우상에 빠져버린 하나님을 멀리 떠난 불행한 민족의 표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 민족이 제 2의 히브리민족으로 성경적 선민이라는 유 목사 주장과는 더욱 맞지 않다. 고조선은 주전 2333년 시작되었다고 한다. 물론 검증된 역사는 아니다. 하지만 수메르문화는 이미 주전 7천-3천년 경 번창한 문명이다. 즉 수메르는 단군(욕단) 후손들이 만든 나라가 아니라 단군이 나라를 세우기 전 이미 수천 년 동안 번창하던 국가였다.

 

필자는 고조선 건국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이 주제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은 단군신화의 바른 성경적 평가를 하는 것이다. 단군 왕검의 고조선은 부침을 거듭하다가 주후 108년 한(漢)나라에 멸망하면서 부여, 읍루, 고(구)려, 비류, 예맥, 쥬신, 해두, 갈사, 동옥저, 동예, 낙랑(윤내현 교수가 말하는 최씨낙랑), 한(韓) 등으로 분화되었다. 그리고 고조선의 전통은 부여와 마한, 변한, 진한 등을 거쳐 결국 성읍국가체계를 갖춘 본격적 국가체제인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이들 4개 국가에서 고조선의 편린이 보여야 한다. 고대 국가의 신화를 평가하는 주요한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토템”이다. 고조선이 호랑이 토템과 곰 토템 부족의 연합으로 시작된 것처럼 이들 4국 신화에서는 단군신화의 토템이 닭 토템, 알(卵生) 토템, 말 토템, 거북 토템 등으로 분화한 것을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들 토템을 성경에 연결하는 접촉 고리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성경은 어떤 경우에도 신앙으로서의 토템을 허용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한반도에서 탈색되어버린 고조선의 천손신화는 일본천황과 일본서기에 그 흔적이 굳건히 남아 일본 민족의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존재하고 있다. 단군 신화를 가지고 우리 민족을 천손민족이라 자랑하는 유 목사의 논리대로라면 실은 우리 민족이 아니라 일본 민족이 고조선의 천손사상을 지금까지 견고하게 지켜온 신앙적으로 자랑스러운(?) 민족이라는 궤변이 성립된다.

 

 

 

단군 제사가 성경적(?), 가나안 신화(제사)적!

 

다른 부족국가들이 종교적 제사가 있었던 것처럼 고조선에도 당연히 제사가 있었다. 하지만 유치한 토템신화를 가진 나라나 민족이 바른 제사를 드렸다는 역사적, 성경적 증거나 신학적 증거는 금시초문이다. 그래서 구약학자 방석종은 단군신화의 삼일신앙이나 삼신일체 구조를 (4-5세기 동방교회의 삼위일체 영향을 차치하더라도) “가나안 신화”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다. 즉 단군이 천제단에서 제사를 지냈다면 그것은 정교한 성경적 제사가 아니라 오히려 토템 문화에 익숙한 가나안 제사 수준의 우상숭배적 제사로 보아야 한다. 이런 비성경적 제사는 특별한 것이 아닌 어느 민족에게서나 보이는 변질된 신앙문화일 뿐이다. 그런 가나안 제사를 부러워하는 기독교인이 있을까? 우리 민족이 그런 제사를 지낸 민족이라고 제 2 히브리 선민임을 인정하고 칭송해줄 사람들이 있을까?

 

성경의 제사는 명확하게 언약을 겨냥한다. 즉 하나님 법의 성취를 통해 구원을 이루기 위해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서 받으신 성육신을 통한 언약의 법을 성취하는 “그리스도의 피로만 속량되고 용서 받는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속죄제사이다. 이 속죄 제사의 구체적 법은 에벨이 아닌 에벨의 6대손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은 미리 알리셨다. 이 언약은 모세에게로 이어진다. 욕단은 아브라함 반열이 아닌 에벨의 후손일 뿐이다. 이 아브라함에게서 인류 주요 종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이 모두 나왔다. 에벨이 히브리 선민도 아니요 아브라함 계열이 히브리 선민도 아닌 것이다. 아브라함 후손들 속에도 이렇게 변질된 종교 문화가 그득하였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여러 후손 가운데 유대인의 일부 지극히 적은 소수가 참 기독교인임을 자청할 뿐이다. 이게 유대인 역사의 실상이다.

 

다시 단군으로 돌아가 보자. 지금도 아브라함 후손들 대부분이 참 제사의 언약적 의미를 무시하는 것처럼 고조선 제사도 온전할 수 없었다. 단군은 호랑이 토템과 곰 토템 부족 문화 결합에서부터 시작되어 곰 토템 족 중심의 고대 국가를 이끈 인물에 불과하다. 토템을 기반으로 한 그와 그 후손들이 가나안 못지않은 변질된 제사를 지냈을 것이라는 점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참된 제사의 의미, 단군 제사와 비교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모형”이다!

 

기독교는 구약 제사를 통해 인류 회개와 십자가의 모형을 보여준다. 단군 제사에 그와 같은 개인 회개와 그리스도의 모형적 의미가 조금이라도 있었던가? 예수와 태백산이 무슨 상관인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유일하고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완전하고 궁극적인 제사다. 솔로몬 성전 재건을 주장하고 구약 피 제사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세대주의 신학의 문제점이 여기에 있다. 기독교 신앙은 에덴동산(여전히 유혹이 있는 장소)이나 성전, 제사 신앙으로의 복귀가 아닌 온전한 구속(회복 즉 새에덴)을 말한다. 유석근 목사가 박형룡 박사의 세대론적 천년기를 동원하여 자신의 단군-욕단설을 감추려 하는 것은 박형룡 박사를 모독하는 것이다. 욕단을 우상화하여 단군화하는 작업(단군-욕단설)이 픽션으로서는 훌륭한 재료가 될 수 있다. 김성일 장로, 최인호, 김진명 같은 탁월한 소설가들에게는 흥미로운 재료거리인 것이다. 하지만 신학의 기본을 제대로 배운 목사라면 절대로 할 일이 아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 단군-욕단설을 한민족 제 2 히브리인 선민신화로 몰고 가는 점이다. 이런 커넥션으로 선민이 될 수 있다면 단군 신화보다 탁월한 중국 상제신화, 일본 천손민족 신화, 몽골부족 천손신화, 알타이족 곰 토템 신화 등등 모두 성경적이라는 민족 이데올로기적인 아전인수식 성경 해석이 난무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경 신학은 <십자가 신학>의 책이 아니라 인간 번영의 희화화된 판타지 신학으로 전락해버리게 된다. 그래서 신학의 입문 시절 <계시론> 서론을 배울 때에 이 같이 그릇된 신화-성경 커넥션 신학(스탠리 그랜츠가 말하는 folk theology)은 왜 거기 빠지면 안 되는 지 철저히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신앙의 기초 신학인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신화-성경의 미숙한 연결고리 주장은 바른 신학을 배운 정상적 목사라면 절대 금해야 되는 신앙의 본질인 것이다.

 

신앙과 신학을 판타지화하는 작업은 대단히 위험하다. 아브라함(히브리) 후손조차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을 탄생시키고 많은 히브리 민족 줄기 가운데 말씀을 받은 유대인들도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가 신앙과 멀어진 만큼 바른 신앙의 여정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그런데 무슨 우리 민족이 아브라함 후손도 아닌 주제에 곁가지에 불과한 욕단(단군 토템) 후손이 되어 그렇게 자랑스럽게 제 2 히브리 선민이 된다는 말인가? 유 목사가 필자를 구 피어선 신학, 평택대 겸임교수라 지칭하면서 자신을 진정 건전한 박형룡 박사를 앞세우는 장자 교단 목사임을 자인하기에 하는 말이다. 사람은 신학자가 되어도 누구나 미숙함은 여전하다. 그게 인간이다. 하지만 장자 교단 출신다운 책임을 다해야 한다. 아무 증거도 없고 바른 신앙적 의미도 없으며 성경적 개혁신앙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괴이한 <단군-욕단>의 동굴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요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강을 누리는 길임을 같은 믿음의 동지로서 진지하게 권면할 뿐이다. 치유의 약은 결코 달콤하지 않고 쓰다. 마치 십자가처럼! “진정한 선민”은 신화에 매달려 복을 누리고 즐기는 “히브리 족”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과 십자가의 영광을 알고 “아리랑과 함께”가 아니라 십자가 지신 승리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 분과 함께 그렇게, 성문 밖 고난 받은 예수처럼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는 것이다(히 13: 12-13).


조덕영 목사(조직신학, 박사)
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창조론오픈포럼 공동대표
김천대, 평택대 겸임교수


(상기의 글은 기독교진리수호연구협회(대표 림헌원목사-예장합동 한돌교회당)의 2016년 6월20일 세미나에서 조덕영 박사가 발제한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