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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6-08 21:55
칭의는 ‘공략’의 대상이 아닙니다(이경섭 목사)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104  

▲이경섭 목사.

칭의는 ‘공략’의 대상이 아닙니다



칭의는 인간이 어찌 해볼 수 없는 인간 권한, 능력 밖의 일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낼 수도 없고, 인간이 조력하거나 간여할 수도 없습니다. 자신의 출생을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인간이 칭의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칭의를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칭의를 중생과 동시적이라 함도, 중생을 자기가 관여할 수 없듯이 칭의도 간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생존이나 건강, 미래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출생하여 장성한 후에나 가능하듯, 이신칭의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야 자기의 영적인 문제에 대해 이런 저런 관심을 표명할 수 있습니다. 이신칭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칭의에 간여하여 자기 힘으로 칭의를 어찌 해보려고 하는 것은, 아직 출생하지 않은 자가 자기 출생에 관여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성화로서 칭의를 도모하려는 로마천주교나 칭의유보자들이 그런 이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힘으로 자기의 출생을 유도하려는 이들입니다. 그들이 칭의, 구원을 논하는 것은 단순히 일반 종교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이런 저런 논의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성화로서 칭의를 도모하려는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불안의 문제가 대두되는데, 이는 칭의와 중생의 미확신에서 나오는 관계론적(relational)이고, 존재론적인(ontological) 불안입니다. 칭의의 기반이 없으니 하나님과 화목이 없어 불안하고, 중생의 확신이 없으니 자기 존재의 근거를 찾지 못한 불안입니다.





물론 불안의 원인이 꼭 이것만은 아닙니다. 칭의유보자들의 파괴적 불안과는 구분되는 불안도 있습니다. 예수 믿고 칭의를 받았음에도 의의 복음을 확실히 몰라서 혹은 타고난 소심증에서 유발된 불안증입니다. 예컨대 죽을 병에서 치유를 받은 사람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해서(혹은 소심증 때문에) 여전히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것처럼, 칭의를 받았음에도 성경에 무지해서(혹은 소심증 때문에) 의의 확신과 평안이 없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그들이 천국에 들어갔을 때 그의 불안이 얼마나 쓸데없는 기우였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불안증에 대해 애굽의 유월절 밤에(출 12:1-30) 일어났음직한 사례를 들어 설명한 어떤 신학자의 말은 적절해 보입니다.


"애굽 땅에 장자 재앙이 도래했을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피를 보고 넘어 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 기다리던 이스라엘 집들의 태도는 둘로 나뉘었다. 한 부류는 어린 양의 피의 효력을 믿고 구원의 확신 가운데서 기다린 자들이고, 또 한 부류는 피를 믿으면서도 타고난 소심증으로 인해 불안 속에 기다리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 속에서 기다리던 집이든, 불안 속에서 기다리던 집이든 다 그 밤에 구원을 받았다. 죽음의 사자가 집을 넘어간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문설주에 발린 어린 양의 피를 보고서였다."


매우 적절한 설명으로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온전히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했다면, 그가 비록 복음 교리를 확실히 몰라서(혹은 소심증 때문에) 불안증을 가졌어도 구원을 받습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도 칭의에 대해 거의 정신병자가 될 만큼 고민하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음에도-그가 구원받지 못했다면 자기 구원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무지로 숱한 날들을 죄의식과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다 후에 하나님의 은혜로 시편 22편과 로마서 1장 17절의 복음을 깨닫고 심판의 두려움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정작 루터 자신에게 있어, 칭의의 불안에 떨었던 과거나 칭의의 확신으로 평안해진 후나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가 구원의 확신을 갖고 평안해진 이유는, 이전보다 더 율법을 완벽하게 잘 지켰거나 삶이 더 완전해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복음의 깨달음이 그런 변화를 갖다 주었습니다.


오늘도 누가 그리스도의 핏빛 공로를 믿으면서도 복음을 확실히 깨닫지 못해서(혹은 소심증 때문에) 불안증을 가졌다면, 그것이 칭의에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루터가 그랬듯, 그 원인이 해소되면 구원의 확신과 평안이 따라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만약 그 불안과 염려가 근원적인 것, 곧 죄사함을 주는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믿지 않은데서 나온 것이라면 그의 두려움에는 동정의 여지가 없습니다. 성경은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불신앙의 두려움에는 심판이 따른다(요일 4:18)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시킨 아들의 피를 짓밝고 거룩한 성령을 욕되게 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히 10:29)."





우리는 성화를 칭의의 조건으로 삼는 칭의유보자들이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화하려고 성경 편린들을-예컨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하라(벧후 1:10)',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마 5:45)'-주워섬길 때 눈을 부릅떠야 합니다. 특히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마 5:45)"는 마지막 말씀의 왜곡에 주의해야 합니다(앞의 내용은 이미 수차례 언급했기에 생략합니다).


그들은 이를 하나님 아들다운 행실의 자격을 갖추면 하나님 아들이 된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이 악인과 선인에게 해를 비취시며 의인과 불의자에게 비를 내리시듯(마 5:45),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원수를 사랑하는(39-44), 하나님 아들다운 삶을 살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의 참 뜻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하나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는-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는(마 5:48)-권면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됐다"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에 설복당할 그들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들은 또 다음과 같이 되받아칩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아들이 못된다는 정도는 안다. 하지만 성경이 또 '이렇게 함으로써 아들이 된다(마 5:39-44)'고 했으니, 이 두 말씀을 다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 아들이 되는 제1조건인 믿음을(요 1:12) 받아들이는 것과 함께, 제 2의 조건인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 5:45)'라는 성화적 요구를 이룰 때 하나님 아들의 자격을 획득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하나님이 절반을 중생시켜 주었으니 나머지 절반은 우리의 성화로 중생을 완성시키라는 주장과 같고, 아이를 절반의 미숙아로 태어나게 해 놓고 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온전하게 되라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에는 '절반'의 탄생이 없습니다. 온전히 중생하든지 아니면 중생하지 못하든지, 온전한 사람으로 태어나든지 아니면 사산아(死産兒)로 태어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이들의 말을 들으면, '의인이며 죄인'이라는 루터의 말을 '절반은 의인이고 절반은 죄인이다'는 말로 곡해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성화는 칭의의 '협력자(helper)'가 아니라 칭의의 '부응자(answer)'라는 사실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본래 자기에게 없던 '전가받은 의'에 일치하려는 투쟁이 성화입니다. 루터에게 있어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는 의미는, 죄인인 내가 또 다른 나, 곧 '의롭다 함을 받은 나'에게 부응하려는 노력의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곧 의롭다함을 받은 나답게 되려는 노력입니다. 동시에 '의인 된' 새사람이 '죄인 된' 옛사람을 이기려는 투쟁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루터가 성화를, 자신 안에 들어온 그리스도가 자신의 죄된 옛 사람과 전투를 시작한 것이라고 한 말은 지당합니다. "동시에 의인이며 죄인 된 존재 안에 내포된 모순은 이생에서 그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그것은 정적인 관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양극 사이를 움직이는 운동이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그리스도는 죄 용서를 받아들이는 신앙과 함께 마음속으로 이끌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 입장에서  그리스도는 이제 옛 사람과의 전투를 시작한다."


루터에게 '의인이며 죄인'은 서로 좁힐 수 없는 갭(gap)이고 갈등관계이지만, 그렇다고 죄인 됨을 영원히 죄인 됨에 머물러 두려는 빌미도 아니었습니다. 이미 언급했듯, 죄인 된 자신이 의인된 자신에게 부응하려는 노력이요, 의인 된 자신이 죄인 된 옛사람과의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둘의 갭(gap)과 긴장관계는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였기에, 둘을 인위적으로 화해시키려는 무모한 시도도 없었습니다.





이는 칭의에 부응하려는 노력이나, 의인이 죄인을 이기려는 투쟁이 결코 칭의를 완성시킬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존 맥아더(John MacArthur)의 지적도 같은 맥락입니다.


"루터는 죄인이 여전히 죄인으로 남게 된다 해서 그가 전혀 변화되지 않은 사람으로 남게 된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구원의 믿음을 지닌 죄인은 중생한 사람이다. 그는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이것이 성화, 즉 죄인이 실제로 의롭게 되어가는 과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구원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복종함으로써 반드시, 즉시, 또한 필연적으로 믿음의 열매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람이 칭의를 받는  유일한 근거는 오직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 외에는 없다. 죄인이 의롭다고 선언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만 그렇게 된다."




마지막으로 성화가 칭의에 기여할 수 없다는 확정으로서의, '뿌리로서의 칭의'와 '열매로서의 성화'의 불변적 지위를 천명하고자 합니다. 뿌리와 열매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고 분리할 수 없지만, 뿌리와 열매라는 위치는 절대로 바꿔질 수 없습니다.


유보칭의자들처럼 성화를 통해 칭의를 구현하려는 것은, 열매를 통해 뿌리를 얻으려는 것과 같고, 수레를 말 앞에 두는 것처럼 앞뒤가 바뀐 것입니다. 성화는 오직 칭의의 원천인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결과(열매)입니다.


다음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의 말도 그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성화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의 피이며, 이것은 성령에 의해 우리의 영혼에 특별하게 적용되게 되는 것이다. 복음의 신비에 속해 있는 진리 중 이보 다 더 명백한 것은 없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계 1:5)',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기를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고 홈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5:26)'."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연구위원,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이신칭의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