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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5-20 22:13
하나님의 영광, 이신칭의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1,277  

▲이경섭 목사.

이경섭 응답하라 개혁신학


 
이신칭의(以信稱義)가 하나님께 영광됨은, 그것이 그리스도로부터 전가 받은 인간의 자긍심이 묻지 않은 의(義)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의존적 인간에게 자긍심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립하려는 반(反)하나님적인 것으로, 세상으로 좇아 나온 것입니다(요일 2:16).



이 자긍심의 유혹은 아담에게 자력으로 삶을 일구도록 꾀었던 마귀로부터 시발되었으며(창 3:5), 그 역사가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입니다. 또 타락 후에는 죄인이 자기 행위로 율법을 이룰 수 있다는 교만으로 나타났습니다. 타락 전이나 타락 후나 이 자긍심은 극복하기 어려운 주제입니다.


자긍심 하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외식자라고 책망한 것도 그들의 자긍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손으로 율법의 의(義)를 일굴 수 있고, 그들이 일군 그 의(義)가 하나님께 영광될 것이라는 담대한 상상을 했습니다.


이 자긍심이 바울이 지적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힘써 세우는 것'이었고,  '하나님 의(義)의 불복'이었습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바리새주의(Pharisaism) 같은 본격적인 율법주의를 위시해 칭의 유보자들, 알미니안(Arminian) 같은 유사 율법주의 신앙에는 모두 이 자긍심이 깃들어 있습니다. 자긍심이 배제된 순종은 오직 무죄하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뿐이며, 이 순종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따라서 죄인이 무흠한 순종에 이르는 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순종을 전가받는 것뿐입니다. 이신칭의론자들은 이 그리스도의 순종을 전가받은 자들입니다.


개혁주의자들이 이신칭의와 하나님영광을 결부시킨 것도 그것이 자긍심이 배제된  하나님의 의이기 때문입니다. 루터(Martin Luther)가 5 Sola의 마지막을  '하나님 영광'으로 장식한 것도 앞의 네 가지가 인간의 자긍심이 배제된-"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조엘 비키(Joel R. Beeke) 역시 이신칭의를  '오직 하나님 영광을 위한 칭의'로 규정했는데, 이신칭의의 속성이 인간의 자긍심이 깃들 수 없는, "오직 은혜로 인한 칭의,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의 칭의, 오직 믿음을 통한 칭의" 이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교리인 이신칭의가 하나님 영광의 교리인 또 하나의 이유는, 은혜 시여를 통해 영광을 취하시는 하나님의 속성 때문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한국 속담이 보여주듯, 종교의 보편적 속성은 치성(致誠, devotions)이며, 정성이 많이 들어갈수록 신이 크게 감동한다고 믿는 것이 일반의 생각입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도 이런 신 개념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인간 공로가 클수록 하나님을 크게 감동시켜 은혜도 많이 이끌어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벧전 5:10)',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호칭에 걸맞게, 값없이 베풀기를 즐기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받기보다는 주시기를 좋아하시며,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해 주신 것들을 더 많이 말씀하십니다. 이는 전적무능한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본래 하나님의 속성이 그러합니다. 다음 성경 구절들도 그런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의 영광에 불탔던 루터는,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즐겨 했습니다. 일견 하나님 영광과 배치되는 말 같지만 하나님의 속성을 정확히 간파하고, 피상적인 하나님 영광 이해를 뛰어 넘은 데서 나온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자체로 만족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위함(God be for us)'을 받아들일 때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과 같습니다. 부모는 자식들로부터 무엇을 받을 때 보다 뭔가를 해줄 때 더 기쁘듯이, 하나님도 받을 때보다 우리에게 베푸실 때 더 기쁘십니다.


자식들에 대한 부모의 가장 행복한 기억은, 스스로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해 주었을 때입니다. 힘은 들었지만, 부모에게는 그때가 제일 행복한 추억으로 남습니다. 자식들이 장성한 후 그들의 봉양을 받을 때도 부모는 그 때만큼 기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그러하십니다. 우리에게서 무엇을 받을 때보다 우리에게 시여하실 때 더 기뻐하십니다.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 19:11)",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는 말씀들은, 우리 이전에 하나님 자신에게 먼저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므로 복되시고, 우리에게 베푸심으로 복되십니다. 만물을 친히 우리에게 주셨고(행 17:25), 마지막엔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은(롬 8:32) 사실 우리에게 기대하실 것이 없습니다.


다음 구절들은 그런 하나님의 심중을 잘 드러냅니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행 7:49-50)", "주는 선하사 사유하기를 즐기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시 86:5)". 설사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바치는 경우에도, 다윗의 고백 대로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린 것 뿐입니다(대상 29:14)."


무엇보다 하나님은 전적 무능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할 수 없는 죄인들에게 이신칭의의 은혜를 베푸시므로 영광을 취하셨습니다. 루터가 십자가를 '영광'으로 표현한 것도 아들을 내어주신 희생에서 하나님이 가장 많이 영광을 취하셨다고 본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탄생시 천군천사들이의 찬송 주제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눅 2:14)"이었던 것 역시, 아들을 내어주신 희생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취하셨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값없이(priceless)' 베푸는 이신칭의의 은혜를 '값싼(valueless)' 구원으로 매도하는 칭의 유보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신칭의의 은혜가 하나님 영광을 위한 교리인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을 받는 자로 하여금 심연의 감읍함을 일으켜 하나님께 자발적인 봉헌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봉헌에 있어 자원함(자발성)은 하나님 영광의 핵심 요소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생축이 되심도(엡 5:2), 그의 희생이 자원함으로 드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목숨을 누구에게 강탈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 제단에 바치셨습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요 10:18)", "오히려 자기의 모든 특권을 버리시고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어(빌 2:7)". 이러한 그리스도의 자발적 순종이 하나님이 받으심직한 제사가 되게 했습니다. 우리의 봉헌에 자발성이 요구되는 이유도 그것이 하나님 영광의 핵심 가치가 되기 때문입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벧전 5:2)".


이 자원함은 오직 은혜 입은 자에게서만 나옵니다.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 116:12)?"는 참된 봉헌자들의 한결같은 신앙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기 위해 먼저 하시는 경륜은 그에게 은혜를 입혀 하나님께 빚진 자로 만드는 것이며, 그 빚진 자 의식이 그의 심연으로부터 감사와 찬양을 이끌어내고 하나님만을 위해 살게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구원하신다(시 79:9) 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시 79:9)".


이 점에서 이신칭의는 하나님의 사랑의 경륜일 뿐더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경륜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댓가 없이 주어지는 이신칭의는 사람들로하여금 구원의 가치를 모르게 할뿐더러, 무율법적 방종자로 만들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신칭의만큼 자발적 순종과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하는 경륜은 없습니다. 이는 사회심리학적으로도 공감되는 부분입니다. 얼마 전 '은혜 경영'이라는 경영기법을 한 방송 매체에서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요약하면, 그 회사에서는 사장에게 사원은 월급쟁이의 단순한 피고용자가 아니라 공동 경영자였습니다. 대표적 한 사례가 회사의 주식들을 전사원이 함께 공유한 것입니다. 그 결과 사원들의 애사심과 능률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을 일반화시킬 수 는 없으며,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구속의 은혜를 회사 경영과 연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지만, "은혜는 반드시 방종을 낳는다"는 반대자들의 논리가 옳은 것만은 아님을 증명해 준 사례입니다.


성경의 모든 참된 헌신자들에게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경륜되었음이 발견됩니다. 모세로 하여금 애굽의 왕자 지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즐겨하게 했던 것도(히 11:25-26), 바울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지위를 배설물처럼 여기고(빌 3:8) 그리스도께 죽도록 충성하게 한 것도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받은 은혜 때문이었습니다(고후 5:15, 고전 15:10).


하나님이 이신칭의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경륜은, 우리를 영원히 하나님께 빚진 자로 만들어 그의 영광만을 위해 살도록 하려는 고도의 전략(?)입니다.


신약성경에는 '경륜(oikonomia)'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등장하는데(엡 1:9, 3:2), 경제(economy)라는 단어의 어근이기도 합니다. 이를 구속 경륜과 결부지으면, 구속의 은혜는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데" 가장 경제적(효율적)이다는 뜻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이 은혜로 되게 하신 이유를,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시 130:4)."


필립 입슨(Philip H. Eveson) 역시 이신칭의의 놀라운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영원까지 경이와 사랑과 찬양으로 충만케 한다고 했습니다.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이 행위는 결코 측량할 수 없는 신비한 하나님의 방법과 비밀로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는 이 일로 인해 놀라며 겸손해지고, 영원까지 경이와 사랑과 찬양으로 충만해질 것이다(Philip H. Eveson,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칭의론 논쟁, 석기신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26)."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연구위원,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