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ct 창조신학연구소
 
작성일 : 17-04-30 21:11
이신칭의는 사랑의 교리입니다(이경섭 칼럼)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390  

▲이경섭 목사
   
 
이신칭의는 사랑의 교리입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는 사랑의 교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가 성령으로 하는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이해가 결여된 이신칭의는 화석같이 죽은 교리가 되거나 사변적 논쟁 대상으로 전락됩니다.


이신칭의를 사랑의 교리라 하는 이유는 스스로의 힘으로 의롭게 될 수 없는 절망적인 인간에게 하나님이 자기희생적 사랑으로 마련해 주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심은,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기원됐다고 말씀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사 63:9).'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은 자녀들이 부모에 대해 늘 그러하듯, 하나님 사랑에 부요한 성도는 이신칭의의 교리에서 죄인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고육지책(苦肉之策)적 사랑을 느끼고,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된다고?' 하는 식의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지 못합니다.


사실 이신칭의를 못 믿는 것은 그것이 지닌 논리적 모순(?)-칭의유보자들이 주장하는-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사랑을 알지 못한 데서 기인됩니다. 우리의 신앙 내용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것이기에, 하나님 사랑의 원만한 이해 없이는 어떤 교리도 신앙도 온전하게 세울 수 없습니다. 루터(Martin Luther)가 "성경의 심장이요, 복음의 축소판"이라고 불렀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는 말씀은, 한 마디로 '신앙은 하나님 사랑을 믿는 것이다'로 요약됩니다.


   

내용을 찬찬히 뜯어보면, 먼저 하나님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셨다는 것과, 그 사랑 때문에 그의 독생자가 세상에 보내졌으며, 죄인으로 하여금 그 독생자를 믿어 영생 얻게 했다는 뜻입니다. 이신칭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는(롬 3:20)' 절망적인 인간에게, 이신칭의 외에 그들을 구원할 어떤 대안도 없기에, 하나님이 고육지책으로 내신 사랑의 경륜입니다. 예수 믿고 영생 얻는(요 3:16) 도리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롬 5:1) 도리나 다 하나님의 사랑에 기반합니다.

따라서 만약 누가 이신칭의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다면, 논리로 그를 설복시키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불신자에게 예수 믿으면 영생 얻는다는 것이 황당해 보이듯,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명목상 교인들에게는 믿기만 하면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는 황당해 보일 뿐입니다.


칭의유보자들 역시 이신칭의를 거부하기 위해 나름의 신학 논리를 펴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 보면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황폐한 마음이 그 뿌리입니다.


모든 기독교 진리를 논함에 있어 이 점이 간과돼서는 안 되며, 이 점을 인식할 때 불필요한 많은 논쟁을 줄일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산물로 규정한 존 파이퍼(John Piper)의 말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이해될 수 있는 성경 내용이나 교리는 없습니다. 기독교가 은혜, 자비, 용서 등 다양한 덕목을 갖고 있지만 사랑이 그 핵심이며, 이는 (요일 4:8)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하나님 정의(定義)'와 관련됩니다.


여기서 사랑은 단순히 하나님을 설명하는 수식어나 형용사가 아니라-예컨대 '사랑의 하나님'이라든지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다'가 아니라-사랑과 하나님을 서로 치환(置換, substitution)시킬 수 있을 만큼 둘이 동일시 됐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내용은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사랑은 여기 있으니)'으로 한정지어집니다. 성경은 이신칭의 역시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 사랑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4)."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이신칭의의 경륜은 불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신칭의를 고안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신칭의에서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자신의 여생을 이신칭의의 경륜에 의지해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그 이유를 이신칭의가 하나님아들의 희생에서 나온 것임을 안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0-21)."


바울 사도는 이신칭의의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 아들의 죽음을 존귀하게 하는 것이고, 이신칭의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 아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신칭의가 단지 많은 은혜들 가운데 하나가 아닌, 그리스도의 희생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임을 간파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간과한 채 이신칭의를 논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신학적 전제(presupposition)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종교개혁자들은 이신칭의를 접근함에 있어 그것의 의미규정에만 급급하여, 이신칭의의 은혜적 측면만 강조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는 중세 로마가톨릭의 인간 공로주의에 대한 변증을 위해서는 개념규정이 우선인 때문이기도 했지만, 종교개혁의 3대 기치(three sola) 가운데 하나인 'sola gratial(오직 은혜)' 의 강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신칭의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이은칭의'(以恩稱義)의 의미 규정을 넘어 뿌리인 하나님 사랑으로까지 추적돼야 합니다.


물론 은혜가 사랑의 중요한 속성이고 때로는 은혜가 사랑으로 대치되기도 하나, 사랑은 은혜의 상위개념이고 은혜는 사랑에 종속됩니다. 성자 그리스도가 사랑의 지위를 하나님께 내어 드리고 자신은 겸손히 은혜의 지위를 점하신 것도(고후 13:13), 사랑을 최고의 지위로 여긴 때문입니다.


누군가 기독교는 사랑으로까지 나아갈 때 온전하게 나아간 것이라고 한 말은 옳습니다. 이신칭의는 자기 의(義)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 사랑에서 나온 것이기에, 사도들의 서술 방식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이신칭의가 언급돼야 합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4-5, 8-9)."


의를 쫓은 이스라엘은 의에 이르지 못하고, 의를 쫓지 아니한 이방인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실은, 이신칭의의 뿌리가 오직 하나님의 긍휼임을 더욱 확실히 해 주었습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5-16) ...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롬 9:30-31)".


스펄전(C. H. Spurgeon) 역시 이신칭의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이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택자를 살리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신칭의 이적을 고안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죄 있는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이 일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이적이다. ... 하나님은 신성의 무한한 주권과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으로 의로운 자가 아니라 경건치 못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일을 맡으셨다. ... 불의한 자를 의롭다 하는 것은 무한한 사랑과 자비로만 되어진다."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 역시 이신칭의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주신 값진 보물이라고 했습니다. "은혜롭게도 복음은 죄된 인간을 의롭다 하시는 살아 계신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아서 관리하라고 주신 엄청나게 값진 진주다."


이신칭의의 사랑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성령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아무리 이신칭의를 하나님의 사랑이라 설명해 주어도 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듯이(고전 12:3),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신칭의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 수준과 가치관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의 기준도 천차만별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은 신비 체험 유무를 하나님 사랑의 기준으로 삼고, 기복주의 신자들은 현세적 축복을 하나님사랑의 기준으로 삼아, 그것들이 없으면 하나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으로 치부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진정한 하나님사랑을 계시해 주시면, 그런 관념에서 벗어나 십자가 희생 위에 세워진 이신칭의가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성령이 오신 목적도 이 일을 위해서였습니다(요 15:26). 아더 핑크(A. W. Pink)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과 그의 대속으로 백성이 영원히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증거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 그의 백성에게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과 그가 이루신 일의 효력에 대해 증거 하시는 분이다(요 15:26). ... 성령은 그에 관하여 성경에 계시되어진 모든 것으로 주 예수를 위해 증거하는 증거자이시다. 그는 그리스도의 대속이 지니는 영원히 변치 않는 효력에 대해 증거하신다. 즉 그로 말미암아 죄가 효력있게 제거되었다는 것, 아버지께서 그것을 받으셨다는 것, 선택된 자들은 그로 인해 영원토록 온전케 되었다는 것, 그리 죄 사함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열매라는 것을 증거하신다."


마지막으로 이신칭의 받은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고 그 사랑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롬 5:8-10). 이는 이신칭의에 역사하는 성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루터는 "이신칭의를 덧입은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힌 자"라고 했습니다. 그는 '크벨레 리베(Quelle Liebe, Spring of Love)'라는 말을 즐겨 썼는데, 그 뜻인즉 '하나님의 복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죄인의 마음속에 솟아나는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롬 5:8-10)'을 의미했습니다(복음과 상황).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도 칭의를 하나님 사랑을 확신하는 통로로 말했습니다. '금생에서 칭의, 양자, 성화됨을 깨닫고 그것들을 바라봄으로써 얻어지는 유익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이다(제36문).'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연구위원,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등